▲1905년 11월 17일 일본과 체결한 을사늑약문서. 이 조약에서는 외교권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을 규정했고,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제국주의 식민지가 된다.
한겨레출판
서울에 올라온 나는 두 가지로 공부할 길을 생각하였다. 하나는 법률 양성소에 다녀 법률을 배워 무지한 민중이 법망에 걸려서 고생하는 것을 구제하여 보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영어 학교에 들어가서 영어를 배워 서구의 진보한 문화를 흡수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필경 당시 우리 나라의 유일한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하였고, 조카는 같은 학교 한어과(漢語科)에 입학하였다. (주석 6)
한성외국어학교는 관립이었으나 학비가 유료이고 숙식까지 각자 해결해야 했다. 과거제가 사라지면서 조정의 내노라하는 실력자들의 자제가 많이 들어왔다. 그만큼 경쟁률이 높았다. 신익희는 여기서 발군의 실력을 보인다.
그때의 영어학교에는 독본과 문법을 영어로 배우는 것은 물론 역사ㆍ지리ㆍ대수ㆍ기하 같은 것을 모두 영어로 배웠었는데 소학교 과정도 완전하게 마치지 못한 그 때의 학생으로는 큰 부담이었다. 교관은 한국사람이 대부분이었으나 영국 사람들도 있었다.
그 당시 현대적으로 낙후된 우리나라 사람들을 대하는 영국인 교사들은 대단히 오만하여 학생들을 멸시하고, 공부를 잘 못하는 학생에게는 우리 말로 '지게꾼놈'ㆍ'상놈'하고 욕하면서 가르치는 데 쓰는 분필(白墨) 토막으로 면상이나 머리를 함부로 내갈기는 것이 상례였다.
나는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공부하여 성적은 때로는 평균 98점을 받아서 그런 멸시는 당하지 않았다. 이 무렵 이 외국어 학교 영어과의 나와 한어과의 조카 정균이 두각을 드러냈다. 나는 융희 황제비 윤 황후의 오라버니 윤홍섭(尹弘燮)과 정구영(鄭求瑛)과 세 사람이 일등을 다투었고, 한어과에서는 조카 정균이 조 대왕대비의 조카 조남준(趙南俊)과 일등을 다투어 숙질이 함께 두각을 드러냈다. (주석 7)
주석
6> 앞의 책, 51쪽.
7> 앞의 책,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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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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