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훼손된 일본인 교장 비석일본인 교장의 비석 흔적이 남아있다.
김동이
한편 일본인 학교장에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교장(校長)바위로 명명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동학 선양을 위한 스토리텔링도 중요하지만, 역사적 진의가 왜곡돼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들의 주장은 교장바위 인근에 일본인 교장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있고, 태안초등학교를 졸업한 졸업생과 일부 향토사학자들의 증언에 따른 데 있다. 문헌상의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태안초등학교 개교 100주년을 맞아 2013년 12월 발간된 <태안초등학교 개교 백년사>에서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향토사학자이면서 태안초등학교 21회 졸업생인 박국환 선생은 '모교는 그립다'에서 교장(校長)바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태안에는 조선 사람 부자들이 많았다. 동양척식이라는 주식회사가 조선 구석구석의 땅을 사들여서 우리 농민을 소작농으로 만들어 5할 타작제를 하고 조선은행, 금융조합을 만들어서 농민을 수탈하여 우리의 농민들은 살 수 없어 제 땅을 버리고 만주 땅으로 남부여대하여 고향을 등지게 된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다.
이즈음 경의정 밑에서 장사하던 일인(高橋)이라는 자가 오만하고 성깔이 되먹지 못해 분노한 학생들 수십 명이 모여 그 자의 가게를 때려 부숴버렸다. 주재소(지서)의 순경들이 학생들을 모두 잡아들였고 이에 당황한 학부형과 학교의 교장이 풀어줄 것을 애걸하게 되었다.
그때의 교장은 나카오 이따로(中尾猪太郞)이라는 분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교육 책임을 들어 사과하고 학생들과 함께 주재소 마룻바닥에서 자면서 취사도구를 가지고 학생들에게 식사를 지어 먹으며 풀어줄 것을 호소하여 학생들이 풀려났다.
그래서 태안사람들은 그 교장이 고마워서 바위 한쪽 구석에 그 일인 교장의 명자를 새겨 고마움을 표시하였던 것인데, 해방 후에 전부 깨어버렸다고 하니 안타깝다."
이와 함께 일부 향토사학자들은 훼손된 일본인 교장의 비석에 비추어 일제 흔적 지우기의 일환으로 '교장(校長)바위도 그 대상의 하나가 된 게 아니냐'는 주장도 펼치고 있다. 역사적 배경을 언급하며 기념사업회가 주장하는 교장(絞杖)바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한 향토사학자는 "동학농민군들이 도망쳐 왔을 때 당시 나무도 없던 백화산으로 숨어들어왔겠나. 도망가려면 관군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숲속으로 도망가지 않았겠나"라면서 "관군도 백화산까지 동학농민군들을 데리고 와서 죽였겠나. 그리고 교살, 장살은 있어도 교장살이라는 단어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인사는 "교장(校長)바위를 가보면 알겠지만, 암벽 등반할 정도의 가파른 바위이다. 그곳에서 동학도들을 처형했다는 게 상식선에서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장바위를 찾았던 누군가가 교장바위에서 밧줄을 묶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둥근 쇠고리가 바위에 박혀 있는 것을 봤다고 했는데 실제 확인되지 않고 있다"면서 "존재한다고 해도 그 둥근 쇠고리가 동학도 처형을 위해 줄을 매달기 위해 설치한 것인지 확정할 수 없고, 다른 용도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교장바위 유래를 두고 이처럼 엇갈린 해석이 분분한 가운데 태안군은 교장바위의 정확한 유래를 찾기 위한 학술용역에 들어갔다. 태안군 관계자는 "군에서 교장바위와 관련한 학술용역을 백제고도문화재단에 지난 7월 20일에 의뢰했다"면서 "학술용역 착수계를 제출한 상황으로, 교장바위의 확실한 유래를 찾아 논란을 일단락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번 학술용역을 통해 지난 수년간 논란이 된 교장바위의 진위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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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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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 추모 vs. 일본인 교장 기념... 태안 교장바위의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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