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일제가 구축한 석조문, 홍예문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인들이 살던 구획은 점점 포화상태로 접어들어 그 구역을 확장하기 위해 인천항에서 동인천으로 들어가는 산을 깎아 홍예문을 조성했다.
운민
이번 시간에는 인천 구도심에 있지만 차이나타운, 개항장 거리와 다소 떨어져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웬만해서 잘 닿지 않지만 역사적 가치를 보았을 때 그 상징성은 여느 명소 못지않은 곳을 가려고 한다.
우선 여기에 가기 위해서는 꽤나 긴 언덕길을 따라 끝없이 올라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하지만 그 끝에 도달하면 터널처럼 생긴 석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평범해 보이지만 인천의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소라 할 수 있다. 바로, 홍예문이다.
과거, 조계지 부근에 살던 일본인들은 점차 건너오는 숫자가 늘고, 더 이상 과밀화된 인구를 수용하기엔 부지는 너무나 좁았다. 결국 동인천역 방면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응봉산 산허리를 잘라 높이 약 13m, 폭 약 7m의 화강암 석축을 쌓는 대공사를 진행하게 되었다. 당시 그 중요성 때문인지 몰라도 일본인들은 혈문(穴門)이라 불렀다.
1908년 축조된 홍예문은 설계와 감독은 일본인이 맡고,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이 투입되어 공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동인천역에서 인천항까지 가려면 중간에 산자락에 막혀 돌아서 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는데 터널의 개통으로 서로의 왕래가 훨씬 수월해졌다.
높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홍예문은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기 전까지 인천 앞바다는 물론 팔미도와 주변 섬까지 한눈에 보였다. 광복 이후에도 주민들은 물론 인천여고, 제물포고, 박문여고 학생들의 주요 통학로로 쓰였다고 하니 이 지역 일대에 살던 사람들에겐 그 추억이 남다른 장소라 할 수 있겠다. 현재도 홍예문은 차량이 다니는 도로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 주변으로는 지역 주민들이 수시로 지나다니고 있었다.
대단한 볼거리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 홍예문을 기점으로 해서 근대기에 건설된 의미 있는 장소들을 두루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출발점이 된다. 굳이 그곳을 목적지로 정하지 않더라도 그 골목 자체가 진한 옛 정취를 풍기고 있다. 비록 예전 근대 시절에 지어졌던 수많은 건물 대신 낡은 가옥과 주택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가로수길과 담쟁이넝쿨이 얽힌 담벼락은 그때 그 시절 그대로의 모습일 것이다.
이제 홍예문 옆쪽의 골목길을 따라 신포시장 방향으로 천천히 언덕을 내려가다 보면 건축의 문외한인 나의 눈으로 봐도 범상치 않은 모습의 성당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