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빙사 숙소 Arlington Hotel 별채 Sumner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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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조선사절단은 미국인들도 접근하기 힘든 최상류 미국 문명 속으로 흡인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사절단에게 가장 중요한 행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고종의 친서를 아서Arthur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해 5월 푸트 주한공사가 한양 부임시에 미 대통령의 서한을 지참하고 가서 직접 고종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고종의 답서를 이번 조선 사절이 가지고 미국 땅에 온 것이지요. 조선 임금의 이 서한을 한국에서는 '국서'라고 일컫군요.
그 때의 국서 제정은 단순히 의례적인 외교행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생긴 이래 최초의 근대적 외교 이벤트일 뿐 아니라, 조선이 이제 더이상 중국의 속국이 아님을 만천하에 웅변하는 자주독립선언이 될 것이었습니다.
사절단이 9월 15일(토)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에 공교롭게도 아서Arthur 대통령은 국무장관과 함께 뉴욕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틀 후 뉴욕을 방문하여 '국서' 제정식을 거행하기로 했습니다.
사절단은 워싱턴에서 이틀 동안 숙소에서 쉬면서 시내 구경도 하고 뉴욕 출장 준비 하였습니다. 주말이었지만 나는 항상 그들 곁에 있었지요. 나와 조선 사절단과의 의사 소통에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사절단에 일본어를 잘 하는 조선인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유길준과 변수 그리고 서광범이 일본어를 하였습니다.
그 중에 가장 유창한 사람은 유길준이었지요. 하지만 유길준과 변수는 서열이 낮아 앞에 나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지요. 나는 공식적으로는 주로 서광범과 의사 소통을 하였고 그가 민영익에게 통역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민명익도 일어를 약간 했으므로 민영익과도 간단한 대화를 직접 하기도 했습니다. 사적으로는 유길준, 변수 그리고 로웰의 일본 비서 등과도 일본어 대화를 즐겼지요.
사담이지만 나는 일본 나가사키에 거주하는 여자 친구와 오랫동안 사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어는 나의 일상어나 다름이 없었지요. 그 여자 친구가 지금은 교토의 동지사 대학 공동묘지에 나와 같이 묻혀 있지요.
그건 그렇고, 나는 또 조선 사절단과 서툰 한국말로 간단한 인사말을 건네기도 했지요. 한국어를 익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에 나는 신이 났습니다. 나는 그 때 존 로스John Ross 목사가 쓴 <COREAN PRIMER 조선어 첫걸음>을 휴대하고 다녔답니다. 그 책을 서광범에게 보여주었더니 놀라더군요. 그는 책장을 넘기면서 묘한 웃음을 짓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런 엉터리 책이 있나..."라고 생각했었다는군요.
헌데, 조선이라는 나라가 생긴 이래 미국의 수도를 처음 방문한 그들은 워싱턴에서 어떤 인상을 받았고 어떤 지식을 얻었을까요? 유길준이 이런 기록을 남겼군요.
"이 도시는 미국의 서울이다. 이 나라를 처음 세운 대통령 워싱턴의 성을 따서 서울의 이름을 삼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던 그의 의로움을 기린 것이다. 이곳은 포토맥 강과 애너코스티아 강의 두 물줄기가 합류하는 요충에 있다. 질펀히 흐르는 강물은 거울을 펼쳐 놓은 듯하고, 맑고 빼어난 봉우리는 그림폭을 펼친 듯하여, 경치가 뛰어나게 아름답다.
관청과 민가의 건축과 배치가 아름다움을 서로 다투고 규모를 반드시 지켜서, 유리와 울긋불긋한 빛이 영롱하게 비친다. 사이사이에 공원을 만들어 기이한 꽃과 풀들을 심어 기르고, 사방으로 통하는 거리는 아스팔트로 포장하였다. 길 양옆에는 나무가 나란히 줄 지었는데, 큰길의 너비가 160척이 되는 곳도 있다. 차와 말이 그치지 않고 화물이 쌓여 있어, 그 번화한 모습은 참으로 큰 나라의 서울답다. 그러나 주민은 15만에 지나지 않는다." - <서유견문록>(서해문집, 2014) 512쪽
9월 17일 월요일 나는 데이비스 국무차관와 함께 사절단을 안내하여 뉴욕으로 향했습니다. 뉴욕행 열차의 특등객실에 승차하여 뉴욕에 도착했지요. 어둑한 저녁이었습니다.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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