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4월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이승만이 하지 미군정사령관과 만나는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마침내 5월 10일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200개 의석을 놓고 전국에서 948명의 후보가 입후보하여 평균 4.74:1의 경쟁률을 나타냈다. 1948년 3월 1일 현재 남한 총인구는 19,947,000명. 유권자 총수는 9,834,000명, 등록유권자는 7,837,504명이었다. 선거과정은 준계엄령 상태와 같았다.
실제로 선거과정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미군정과 경찰의 공식기록에 따르더라도 무질서와 폭력이 난무했던 선거였다. 경무국은 선거당일에만 51명의 경찰과 11명의 공무원이 피살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166곳의 선거관련 관공서와 대부분이 파출소로 구성된 301개 국가기관이 피습당했다. 선거 직전 5주 동안 무려 589명이 선거와 관련하여 목숨을 잃었고, 총 10,000명이 넘는 선거사범이 5.10총선거 관련하여 구속되었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4ㆍ3항쟁이 진행중이던 제주도에서는 세 개의 선거구 가운데 두 곳에서 선거를 치루지 못했다. (주석 8)
남북협상파와 민족주의계열이 참여하지 않는 가운데 실시된 5ㆍ10총선거는 71.6%의 투표율로, 당선자는 무소속 85명, 이승만의 독촉 55명, 한민당 29명, 대동청년단 2명, 기타 19명이었다. 무소속 가운데 한민당 계열임에도 불구하고 당의 이미지 때문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사람이 많았다.
따라서 실제로 한민당 소속이 76석, 독촉계열이 61석으로 분류되었다. 결과론적으로 이승만과 한민당이 승리한 선거였다. 하지만 미ㆍ소공위 미국측 대표단의 벤자민 위임스가 인정했듯이 "선택할 후보자 명단 자체가 비대표적이었기 때문에 총선거 결과가 남한 주민의 의사를 정확히 반영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주석 9)
신익희는 고향인 경기도 광주군에 후보등록을 마쳤다. 경쟁자가 없어서 무투표 당선이 예정되었다. 전국적으로 유능한 민족주의계열 후보를 찾아 지원유세를 하였다.
남과 북이 한데 뭉쳐서 통일정부를 세우자는 주장은 언뜻 듣기에는 그럴 듯 하다. 그러나 이루어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공상이다. 호랑이에게 "네 가죽이 얼룩얼룩한 게 보기좋으니 나에게 다오"라고 말한다고 호랑이가 제가 죽을 줄 알면서 응낙하겠는가?
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 이치로 민주주의를 하자는 우리에게 공산독재를 하자는 그들이 합쳐지겠는가? 안 될 일이다. (주석 10)
주석
8> 전상인, 〈이승만과 5.10총선거〉, 유영익 편, 『이승만연구』, 472쪽, 연세대학출판부, 2000.
9> 앞의 책, 475쪽, 재인용.
10> 신창현, 앞의 책, 3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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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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