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 김현미 지음, 반비 펴냄<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 김현미 지음, 반비 펴냄
반비
실패의 경험
내가 알던 '온전한 시간'이 허물어진 것은 단지 그 의미에서만은 아니었다. 그 '온전함'이란 시간이 선형적으로 흐름을 상정한 것임을 이전에는 몰랐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거의 멎자 내부에서 무언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채 묻어두었던 기억들과의 대면이었다. 과거의 각주로만 현재가 쌓이는 날들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대학 안에서 페미니스트로서 싸웠던 날들은 내가 겪은 가장 밀도가 높은 나날이었다. 그 시기를 함께 겪은 이들이 지금은 모두 그 판에서 떠났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들려오는 근황들로 모두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짐작하게 된다. 죄책감과 원망이 뒤섞인 감정이 따라온다.
돌아간다면 나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까? 기억은 매번 이 질문과 함께 반복되었다. 책은 '감정과 친밀성을 나눌 수 있는' 여성 연대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p.141). 그 부분에서 한참을 머물러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 실패가 무엇보다 내 주위의 여성들과의, 페미니스트들과의 관계맺음의 실패였기 때문이었다.
큰 문제들과 나를 직접 연관시키는 방식으로만 생각하는 동안 내 주변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맺을 것인지, 먹고 사는 일에서 어떻게 페미니즘적 가치를 실현할 것인지의 고민은 부족했다.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을 통해 저자는 바로 그 고민에서부터 정치가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내 에너지를 누구와 무엇을 모색하며 어떤 희망과 목적을 갖기 위해 만들어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 무엇이 중요한 일이며 기쁜 일인지에 대한 '참조 체계'를 바꾸는 과정이 바로 '라이프스타일로서의 페미니즘'이다.
서울로 돌아가면 나는 어떻게 될까?
불안은 여전하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면 나는 같은 이유로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아무리 나를 잘 돌보고 살아도 이런 세상에선 장기계획이 무용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인식하는 현실과 미래전망은 너무 비관적이어서 차라리 병증 탓인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여전하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이 말하듯, 그 현실을 당장 바꿀 수는 없어도 불안을 다루는 태도는 달리할 수 있다. 그런 태도를 자기 것으로 갖게 되고 안정을 찾는 것은 결코 선형적으로 진행되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지향점을 알게 된 지금, 더 이상 예전처럼 불안하게 표류하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페미니스트로서 싸우는, 여전히 페미니스트가 되어가는 중인 이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이 흔들리면서도 자기 길을 내고 가꿔온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다. 그 삶에 응원을 보낸다고, 나도 잘 살아가겠다고 말하고 싶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을 통해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운동을 하는 여성노동운동 단체입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