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렐리우 수비대 소속이었던 츠치다 씨의 증언(2008년)"소변을 마시는 이도 있었고... '물이 마시고 싶다'고 애원하는데... 죽는 순간이 되면 물이 그토록 마시고 싶게 되나봐요. 하지만 줄 수 있는 물은 전혀 없었죠. 결국 그렇게 죽는 것이죠... 정말이지 지옥 같은 싸움이었네요."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이제 펠렐리우의 일본군 장병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섭씨 40도가 넘는 뜨거운 동굴 안에서 숨을 죽인 채 삶의 마지막 순간만을 기다리는 뿐이었다. 그들에게는 이제 식수조차도 없었다. 종유석에서 흘러나오는 한방울 한방울의 물방울이 일본군 장병들의 삶을 지속시키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급기야는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는 병사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병사들까지 속출했다. 펠렐리우의 일본군이 정상적인 작전을 전개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음은 누가 봐도 명백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본영(제국일본의 전쟁지도부)에서는 펠렐리우 수비대를 향해 끊임없이 '지구전'을 독려했다. 즉 하루라도 더 저항을 계속하여 필리핀으로 향하는 미군의 발을 묶어두라는 주문이었다. 물론 이 주문을 이행하기 위해 필요한 지원을 대본영에서 베풀어주는 일은 없었다. 절망한 펠렐리우 수비대를 향해 대본영이 보내준 것이라고는, 펠렐리우에서 '영웅적 싸움(敢闘)'을 이어가는 장병들에게 쇼와 천황이 보내는 말뿐인 치하였다.
10월 20일, 미군이 필리핀에 상륙했다. 펠렐리우는 이제 미군의 필리핀 탈환전을 저지하는 거점으로써의 전략적 가치를 완전히 상실했다. 펠렐리우 수비대를 지휘하던 나카가와 쿠니오(中川州男) 대좌는 더 이상 지구전을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고 판단해 최후의 돌격을 허락해달라는 전보를 대본영으로 송신했다.
그러나 대본영에서는 펠렐리우에서의 저항이 '일억 일본국민의 전의를 고양하고 있다'고 답하며 나카가와 대좌의 요청을 외면했다. 의미 없는 지구전은 그렇게 계속 강요됐다.
11월 22일, 펠렐리우 수비대 사령부를 향한 미군의 대대적인 소탕전이 시작됐다. 군기와 기밀서류를 불태운 나카가와 대좌는 24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펠렐리우에서의 조직적인 저항은 이날을 기점으로 막을 내린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아직 펠렐리우 섬에는 여전히 '지구전' 명령에 속박돼 있던 80명의 패전병들이 남아있었다.
1945년 일본 항복 선언 이후에도 계속된 싸움
패잔병들은 언젠가는 본국의 아군이 펠렐리우를 탈환할 것이라 믿으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러나 그들의 바램과는 달리 1945년 8월 15일 제국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다. 패잔병들은 조국의 패전 소식을 모른 채 동굴 속에서 그들만의 전쟁을 이어나갔다. 연합군사령부의 지도 아래 일본에서 새로운 헌법이 발표되고 이른바 민주주의 질서가 세워지던 1947년에 이르러서도, 펠렐리우 패잔병들의 지구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패잔병들의 존재를 의식한 미군이 일본 정부의 협조를 받아 투항권고 방송까지 벌였지만 소용없었다. 급기야, 투항권고 방송을 믿고 동굴을 나가려던 병사가 패전 사실을 믿지 않았던 전우에 의해 사살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장병들에게 최후의 순간까지 지구전을 강요했던 제국의 망령은 여전히 그들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