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영역덕수궁 영역을 표시한 안내판. 하늘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사라지고 없는 궁궐영역. 남은 건축물의 축선이 명확하다. 궁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부터 시청앞 광장에 이르는 넓은 공간이었다.
이영천
궁궐조영은 임금이 남면(南面)함으로써 권위와 권력을 확보한다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축으로 조영된 경복궁 전각 배치가 대표적이다. 남면의 원점 근정전을 중심으로, 남으론 문(근정문, 흥례문, 광화문)을 북으로는 전각(사정전, 강녕전, 교태전)을 세웠다. 전조후침(前朝後寢)이다. 물론 지형과 공간제약에 따라 예외는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덕수궁(경운궁)이 여기에 해당한다.
덕수궁의 탄생과 변화
덕수궁은 순전히 일본 때문에 생겨난 궁궐이다.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사라지자, 선조가 중층 석어당(昔御堂)을 임시거처(時御所)로 사용하면서 정릉동 행궁으로 탈바꿈한다. 이때 즉조당(卽阼堂)이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석어당은 월산대군 소유였다. 이 집이 단청 없는 민가(民家)로 남은 이유는, 고난을 겪어낸 당시를 잊지 않기 위해 당초 모습을 바꾸지 않고 지켜온 때문으로 보인다.
아관으로 파천한 고종은 이 궁을 정궁으로 삼는다. 광해군이 계모를 이곳에 유폐시킨 후 280년 만이다. 몇 차례 중창을 거치며 궁역은 넓어졌으나, 지금은 중화전 일곽만 남았다. 사라진 선원전 일곽과 돈덕전 등이 복원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