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미국 전략첩보대(OSS)에서 제1기로 훈련을 받던 시절의 김준엽(가운데). 오른쪽이 장준하, 왼쪽이 노능서이다.
장준하기념사업회
김준엽은 해방 후인 1949년 귀국,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1957년 교내에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세웠고 내부에 통일을 위한 공산권 연구실을 설치했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 전문 연구기관이었다. 그는 한때 광복군 동지 장준하가 창간한 <사상계>의 주간을 맡기도 했다.
1982년 고려대 총장이 됐으나 전두환 정권과 맞서다 1985년 강제로 사임했다. 당시 전국의 다른 학교에서는 "어용 교수, 어용 총장 물러가라"는 데모가 끊이지 않았지만, 고려대 학생들은 정반대로 "총장님 힘내세요"라는 현수막을 들고 총장 퇴진 반대 시위를 벌였다.
총장직에서 물러난 후 회고록 <장정>을 집필하고, 연구에 몰두하였다. <장정>은 일본 징집병 탈출 및 광복군 시절, 고려대 총장 시절과 총장 퇴임 이후 등을 다루고 있다.
2011년 6월 그는 폐암 투병 중 사망했다. 생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된 데 이어 타계 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다. 그의 유해는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 397호에 안장돼 있다. 부인인 민영주 애국지사는 10년 후인 2021년에 타계, 독립유공자 6묘역에 안장됐다.
"씨알은 죽지 않습니다"
길고 흰 수염, 백발, 두루마기, 고무신… 함석헌(1901~1989) 선생 하면 떠올리게 되는 외모다. 그는 1901년 3월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났다. 평양고보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 하숙방에서 목판으로 태극기를 새겨 찍어내고 경찰서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렸다가 결국 졸업하지 못했다.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했고 1942~43년 고향인 용천에서 〈성서조선〉 필화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그의 사상의 폭은 깊고 넓었다. 기독교 사상에서 머물지 않고 불교 공부를 하기도 했다. 톨스토이로부터 보편적 휴머니즘, H. G. 웰스로부터 역사적 낙관주의, 간디의 비폭력평화주의를 이어받았다. 또 노자와 장자를 강의할 만큼 동양철학에 해박했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사상계의 글로 옥살이를 했는데 이는 자유당 정권의 대표적인 필화사건이었다. '한국 기독교 무엇을 하고 있는가'(교회 비판), '5.16을 어떻게 볼까' 등의 글로도 필화사건을 겪었다, 또 군정 반대, 월남파병 반대, 한일굴욕외교 반대, 삼선개헌 반대 운동 등 행동하는 지식인의 상징이었다.
그는 1984년부터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으며 6월 항쟁 때는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국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때문에 '싸우는 평화주의자', '한국의 간디', '야인', '지사', '민권운동가', '자유주의자', '행동하는 지성' 등 많은 애칭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