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대에 위치한 모 부대 군인들이 홍범도 장군의 묘에 참배하고 있다.
심규상
문 대통령은 특히 "아직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애국지사들이 많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이 많으며, 가려진 독립운동의 역사가 많다"고 덧붙였다. 실제 '봉오동 전투'와 관련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이 꽤 있다.
봉오동전투 총사령관 '최진동'
그중 한 명이 최진동(?-1945)이다. 홍범도 장군이 당시 대한북로독군부 제2연대장이었고 최진동은 총재 겸 총사령관이었다. 당시 대한북로독군부는 간도에서 활동한 무장독립군, 즉 6개 무장부대 통합군단이었다. 홍범도가 사령관으로 있던 '대한독립군'은 이 중 1개의 독립군부대였고 이후 대한국민회와 연합해 대한북로독군부 창설에 참여했다. 당시 홍범도는 대한북로독군부의 지휘 체계상 여덟 번째였다. 최진동은 모스크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했을 때 레닌으로부터 홍범도와 함께 권총을 선물 받을 만큼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는 일찍이 만주로 건너가 중국 순경국장으로 근무하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독군부를 조직하고 이봉남·이원 등과 함께 대원 500여 명을 모집하여 훈련했다. 그는 또 여러 차례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하여 회령·온성·종성 일대의 일제 기관을 파괴했다. 특히 1920년 6월에는 만주 봉오동에서 일본군 500여 명을 살상하는 대승을 이끌었다. 그해 10월에는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봉오동 전투 이후 러시아 땅으로 이동한 최진동은 오므스크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했으며 중국으로 돌아온 뒤 군벌 간의 대립 중에 오패부의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중국경찰에 체포돼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0년 독립군 규합을 위해 벌목공을 모집하던 그는 다음해인 1941년 일본 헌병에 끌려갔다. 최진동 소유의 땅에 비행장을 건설하려던 일제의 토지 기부 요구에 불응한 대가였다. 모진 고초 끝에 간신히 풀려난 그는 고문의 후유증이 악화돼 그해 11월 별세하였다. 장례는 철저히 일본 헌병에 의해 치러졌고, 시신은 철관에 넣어져 농지 한가운데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