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세 지사가 순국하자 대한매일신보는 12월 5일자 1면에 그의 유서를 공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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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세가 음독 순국하기 하루 전인 11월 30일 전 내부대신 민영환이 칼로 목을 찔러 자결했으며 전 참판 홍만식, 학부주사 이상철, 평양대 일등병 김봉학 등 많은 인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민영환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했다.
정부는 조병세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고,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4묘역 380호에 안장하여 추모하고 있다.
4대가 현충원에 이남규‧이충구‧이승복‧이장원
을사늑약에 목숨을 끊어 항거한 애국지사가 있었다면, 목숨 걸고 일제에 항거한 애국지사들도 많았다. 특히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는 무려 3대가 일제에 항거하고 4대가 안장되어 있는 가문이 있다. 바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스승으로 유명한 수당 이남규 선생의 가문이다. 그의 아들 이충구 선생, 손자 이승복 선생, 증손자 이장원 해병 소위까지 모두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1대 이남규 선생은 고종 19년에 문과급제 후 황제의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궁내부 특진관에 올랐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남규 선생은 고종에게 일제와의 결전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임하고 충남 예산 향리로 돌아갔다. 1906년 병오의병 당시 홍주(홍성)에서 의거하였던 전 참판 민종식이 홍주성에서 일본군에 패해 피신하게 되자, 선생은 그를 숨겨주었다. 그의 아들 이충구 선생 또한 아버지를 따라 항일 활동을 펼쳤다. 민종식의 피신을 도왔다는 것을 안 일본군은 두 부자를 감옥에 가두고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훗날 의병과 관련 있다 하여 1907년 9월 26일 헌병에게 압송됐다. 그 당시 선생은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士可殺不可辱)라며 스스로 가마에 올랐다. 공주형무소에 투옥된 뒤 얼마뒤 충남 아산 평촌 냇가에서 일본군에 의해 아들 이충구, 집사인 김응길과 함께 무참히 살해됐다. 두 선생이 참변을 당할 당시, 손자인 이승복의 나이는 겨우 1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