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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충원에 4대가 안장된 유일무이한 가문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 대전현충원19] 을사늑약에 죽음으로 저항한 순국지사들

등록 2021.10.25 07:22수정 2021.10.25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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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죽은 뒤에 진실로 분발하고 결단을 내려,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오적을 대역부도의 죄로 논하고 코를 베서 처단함으로써 천지와 신인에게 사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곧 각국의 공관과 교섭해서 허위 조약을 회수해 없앰으로써 국운을 회복한다면 신이 죽은 날이 태어난 날과 같을 것입니다. 만일 신의 말이 망령된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신의 몸을 가지고 젓을 담가 역적들에게 나눠주소서.
- <고종실록 고종 42년 12월 2일자>
 
1905년 11월 20일,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원로대신 조병세가 자결하면서 고종에게 보낸 유서의 내용이다. 외교권을 빼앗기고 수많은 지사들이 죽음으로 저항하였는데, 조병세는 그중 가장 나이 많은 원로 대신이었다.
 
 을사늑약에 저항해 음독 순국한 조병세 선생이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을사늑약에 저항해 음독 순국한 조병세 선생이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우희철
 
1859년에 사관으로 관직을 시작한 그는 함경도 암행어사, 대사헌, 의주부윤, 공조판서, 이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했다. 1889년에는 한성부판윤, 우의정을 거쳐 1893년에 좌의정에 이르렀다. 1894년 중추원 좌의장이 되었다가 사직했고 1896년 폐정개혁을 위해 시무 19조를 상소했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권이 박탈되자, 원임의정대신이었던 조병세가 상소의 우두머리가 되어 백관들과 함께 연명 상소를 올려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비답이 있기도 전에 일본 헌병에 의해 표훈원에 구금되고 백관들은 해산됐다.

다시 대한문 앞에서 석고대죄하며 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다가 또다시 일본헌병에 강제연행된 후 경기도 가평으로 추방되었다. 그는 다시 상경하여 표훈원에서 유언을 담은 상소문과 각국 공사 및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 '결고국중사민서(訣告國中士民書)' 3통을 남기고 12월 1일 음독 자결하였다. 선생의 자결 소식과 유서 내용은 1905년 12월 5일자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었고, 국민들의 국권회복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결집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조병세 지사가 순국하자 대한매일신보는 12월 5일자 1면에 그의 유서를 공개하고 있다.
조병세 지사가 순국하자 대한매일신보는 12월 5일자 1면에 그의 유서를 공개하고 있다. 빅카인즈
 
조병세가 음독 순국하기 하루 전인 11월 30일 전 내부대신 민영환이 칼로 목을 찔러 자결했으며 전 참판 홍만식, 학부주사 이상철, 평양대 일등병 김봉학 등 많은 인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민영환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했다.

정부는 조병세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고,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4묘역 380호에 안장하여 추모하고 있다.

4대가 현충원에 이남규‧이충구‧이승복‧이장원

을사늑약에 목숨을 끊어 항거한 애국지사가 있었다면, 목숨 걸고 일제에 항거한 애국지사들도 많았다. 특히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는 무려 3대가 일제에 항거하고 4대가 안장되어 있는 가문이 있다. 바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스승으로 유명한 수당 이남규 선생의 가문이다. 그의 아들 이충구 선생, 손자 이승복 선생, 증손자 이장원 해병 소위까지 모두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1대 이남규 선생은 고종 19년에 문과급제 후 황제의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궁내부 특진관에 올랐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남규 선생은 고종에게 일제와의 결전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임하고 충남 예산 향리로 돌아갔다. 1906년 병오의병 당시 홍주(홍성)에서 의거하였던 전 참판 민종식이 홍주성에서 일본군에 패해 피신하게 되자, 선생은 그를 숨겨주었다. 그의 아들 이충구 선생 또한 아버지를 따라 항일 활동을 펼쳤다. 민종식의 피신을 도왔다는 것을 안 일본군은 두 부자를 감옥에 가두고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훗날 의병과 관련 있다 하여 1907년 9월 26일 헌병에게 압송됐다. 그 당시 선생은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士可殺不可辱)라며 스스로 가마에 올랐다. 공주형무소에 투옥된 뒤 얼마뒤 충남 아산 평촌 냇가에서 일본군에 의해 아들 이충구, 집사인 김응길과 함께 무참히 살해됐다. 두 선생이 참변을 당할 당시, 손자인 이승복의 나이는 겨우 13세였다. 
 
 수당 이남규 선생은 의병장 민종식을 숨겨주었다는 혐의를 받고 일본 헌병에 의해 자택에서 연행됐다. 사진은 충남 예산군 대술면에 있는 이남규 선생의 고택.
수당 이남규 선생은 의병장 민종식을 숨겨주었다는 혐의를 받고 일본 헌병에 의해 자택에서 연행됐다. 사진은 충남 예산군 대술면에 있는 이남규 선생의 고택. 우희철
 
이승복 선생은 일찌감치 만주로 건너가 1913년부터 노령과 북만주에서 이동녕·이회영·이시영·이상설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 기반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했다. 1920년에는 연해주에서 <청구신문(靑丘新聞)>을 발간하고 신문활자를 노령으로 운반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6개월간 구금당하였다. '대한국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

1921년에는 이시영·조완구·조소앙 등과 함께 임시정부 국내 연통제(聯通制) 조직결성에 힘썼고, 1923년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파의거에 연루돼 고초를 겪었다. 신사상연구회 조직, 정우회 참여 등의 활동을 벌였다.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예산지회를 주도·조직하였다. <조선일보> 이사 겸 영업국장으로 재직하던 중 만보산사건의 진상을 보도하여 민심을 혼란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안재홍과 함께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45년 3월 일본헌병사령부의 예비검속으로 구속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해방후 국민당, 한국독립당, 신한국민당에 몸담았으며 1946년 민주일보 부사장으로 활동하다가 낙향해 한학연구와 농업에 종사했다. 1978년 10월 31일 서울에서 돌아가셨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이남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아들 이충구 선생에게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손자인 이승복 선생에게는 1980년 건국포장‧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했다. 그리고 2010년에 이들 3대 애국지사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을사늑약에 저항한 수당 이남규와 그의 아들 이충구, 독립운동에 앞장선 손자 이승복 선생이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
을사늑약에 저항한 수당 이남규와 그의 아들 이충구, 독립운동에 앞장선 손자 이승복 선생이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 우희철
 
이남규 선생의 증손자인 이장원 해병 소위 또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해병 사관후보생 5기로 입대해 9월에 소위로 임관한 뒤, 독립 42중대에 편재돼 원산 앞바다에 있는 섬 황토도의 파견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북한의 전력이 집중된 이 섬에서 교전 중 영내에 떨어진 포탄으로 전사했다. 1계급 특진과 충무무공훈장이 추서됐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국립현충원에 4대가 안장된 가문은 이남규 선생의 가문이 유일하다. 대한제국에서부터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국난의 시기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가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시민미디어마다당 사회적협동조합 누리집에도 게재되었습니다.
대전에서 활동하는 시민미디어마당 협동조합입니다.
#국립대전현충원 #조병세 #이남규 #이충구 #이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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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일간신문에서 사진기자로 활동, 2007년 <제1회 우희철 생태사진전>, <갑천의 새와 솟대>, 2008년 <대청호 생태사진>, 2008년 <하늘에서 본 금강> 사진전 동양일보 「꽃동네 사람들」, 기산 정명희 화가와 「금강편지 시화집」을 공동으로 발간. 2020년 3월 라오스 신(新)인문지리서 「알 수 없는 라오스, 몰라도 되는 라오스」를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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