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8월 18일, 최규하 전 대통령(오른쪽)이 청와대를 떠나기 앞서 전두환 국보위 위원장의 예방을 받고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다. 가운데는 민관식 국회의장 직무대행.
연합뉴스
폭군 전두환의 모습은 1980년 가을에도 명징하게 나타났다. 그해 8월 16일 사임한 최규하 대통령에 이어 9월 1일 청와대에 들어간 그는 10월 22일 헌법개정 국민투표를 실시한 뒤, 제5공화국 헌법의 발효를 명분으로 폭정을 실시했다. 새 헌법이 시행된 첫날인 10월 27일의 <경향신문> 1면 머릿기사는 이렇게 보도했다.
"이날 헌법이 발효·시행됨에 따라 공화·신민·통일·유정회 등 각 정당과 정파 그리고 국회가 해산됐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전면 폐지됐다. 또한 입법 기능은 국회 해산과 동시에 국가보위입법회의에 넘어갔으며, 입법회의는 정치풍토특별조치법안을 비롯한 각종 법안과 예산안 등을 다룰 예정이다."
5.18 학살 5개월 뒤, 전두환은 제5공화국 출범과 동시에 국회와 정당부터 해산했다. 이때 그가 출범시킨 국가보위입법회의는 국회의 기능을 대신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권능까지 행사했다. 이 기구는 정치인의 자격을 심사하고 판정하는 정치풍토특별조치법을 제정해 1980년 11월 12일 정치인 811명이 정치활동 규제 대상자로 지정되고 15일에는 24명이 추가 지정되도록 만들었다.
국회의원보다 훨씬 막강한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위원들은 전두환에 의해 임의로 선출됐다. 10월 28일 제정된 국가보위입법회의법은 제2조에서 "입법회의는 헌법과 법률에 정한 국회의 권한을 행사한다"고 한 뒤 제3조에서 "입법회의는 정치·경제·사회·문화·행정 기타 각계의 학식과 덕망이 있는 인사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하는 50인 이상 100인 이내의 의원으로 구성한다"고 규정했다.
전두환이 임명한 입법위원들이 '정치인 자격'의 심사에 관한 기준까지 만들었다. 이들이 1980년 10월 28일부터 1981년 4월 10일까지 활동했고 그 토대 위에서 제5공화국이 운영됐다. 전두환 시대의 정치라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했는지,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알 수 있다.
전두환 '맡기는 정치'의 치명적 한계
윤석열은 1979년에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저항이 활발했던 1980년대를 20대 청년으로 살았다. 그래서 전두환의 폭정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그랬는데도 그는 '전두환이 정치는 잘했다'고 평가한다.
윤석열 같은 이들은 '전두환이 물가만큼은 잘 잡았다' '전두환은 전문가에게 맡겼다' 등의 말을 하지만, 이는 실상을 정확히 반영한 이야기가 아니다. 전두환이 물가상승을 억제한 비결은 다름 아닌 노동 탄압이었다. 노동자들을 억압해 임금 인상을 막는 방법으로 물가를 관리했던 것이다.
이 점은 전두환 경제정책의 기틀을 세운 김재익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의 정책 기조에서도 확인된다. 1983년 10월 14일 <경향신문>은 "저물가·저금리·저임금을 바탕으로 한 그의 정책 신념은 제5공화국 경제정책의 기둥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아 왔다"고 말한다.
공권력을 동원한 노동 탄압으로 임금을 억제하고 이를 토대로 물가를 관리했다는 것은 전두환의 경제정책이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수의 특권층을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국민의 시각에서는 전두환 시절의 경제가 나빴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시절에 일반 대중이 공정한 대가를 받았다면, 1987년 6월항쟁 때 넥타이부대로 상징되는 중산층이 거리로 대거 몰려나온 이유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전두환이 '맡기는 정치'를 했다는 평가도 문제점이 있다. 전두환이 김재익 경제수석 같은 전문가에게 과감하게 권한을 넘겼다고 칭찬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김재익은 1981년 정부조직법 상의 경제기획원 장관이 아니라 전두환과 함께 청와대에 근무하는 비서관이었다. 비서관에게 일임하는 것과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일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청와대 내의 업무 분장을 놓고 전두환이 업무 위임을 잘했다고 평가하긴 힘들다.
전두환이 했다는 '맡기는 정치'가 실상은 그런 것이었다는 점은 5공 시절의 청와대 비서실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1990년 11월 25일 <한겨레>는 "5공화국 하에서도 한때 비서실이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한 적이 있다"며 "5공의 비서실은 대통령의 보좌·참모 및 행정 조정 기능은 물론 상당 부분은 행정부를 장악하고 지휘하는 역할까지 맡았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전두환이 권한을 각 부처에 잘 분배했다면, 그 시절의 청와대가 그렇게 막강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청와대 비서실이 막강했다는 것은 전두환이 정부부처 업무 분장을 제대로 하지 않았음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5.18과 전두환을 분리하는 발상 자체가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