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곡부의 행단과 비슷하게 만든 궐리사의 행단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중국 곡부의 행단을 본떠 만든 궐리사의 행단이다. 현재 1층은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학습관으로 사용되고 2층은 고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운민
"공자왈, 맹자왈~ " "공자 가라사대~ " 누구나 한 번쯤 공자라는 인물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혼란스러웠던 춘추전국시대에 태어나 인(仁)을 설파하기 위해 전국을 주유(周遊)했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부국강병을 우선시한 국가들에게 인(仁)을 설파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였다.
공자 생전에 그의 사상은 어느 국가에서도 받아 주지 않았지만 수백 년이 흐른 후 한나라가 법가와 도교 대신 유교를 주요 사상으로 채택하면서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주류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부터 들어왔던 유교사상은 시대를 거듭하면서 국가의 주류로 점차 편입되기 시작했다. 유교를 근본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시대에 공자의 존재감은 신과 동급이 되면서 그 누구도 감히 비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서양 열강들의 침입으로 시작된 혼돈의 근대화를 거치고 난 후 우리에게 공자는 낡고 시대에 뒤처진 인물로 인식하게 되었고, 한동안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를 정도로 공자에 대한 논쟁이 한동안 팽배했었다. 오산의 궐동, 주택가 바로 옆에는 우리나라에서 단 두 개뿐인(다른 하나는 논산의 노성 궐리사) 공자를 모신 사당이 있다.
주변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주택가지만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니 수령이 족히 수백 년은 넘어 보이는 거대한 은행나무와 엄숙해 보이는 한옥 건물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그렇다. 이곳이 바로 오산의 대표적인 문화재인 궐리사다. 하지만 현재 코로나 팬데믹 상황으로 궐리사로 들어가는 외삼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다행히 궐리사를 관리하시는 사무처장님의 도움으로 궐리사를 무사히 취재할 수 있었다.
현재 궐리사의 사무동은 궐리사 권역 내에서 서쪽에 위치한 한옥 건물인 인성 학당 지하 1층에 위치해 있었다. 현재 오산 화성 궐리사는 예절, 유학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인성 학당에서 진행하고 있다. 궐리사는 공자가 살았던 마을인 궐리촌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일반 향교나 서원 등에서는 공자의 위폐를 모시는 데 반해 여기는 공자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원래 궐리사는 오산, 논산을 비롯해 강릉, 제천까지 네 군데가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는 두 군데만 남아 있다. 오산 화성 궐리사는 본래 공자의 64세손인 공서린 선생이 중종 때 발생한 기묘사화로 인해 낙향하여 강당을 세우고 그 앞에 손수 은행나무를 한 그루를 심은 후 북을 걸고 두드려 제자를 기르면서 여생을 보내던 곳이라 한다.
여기서 잠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어떻게 공자의 후손이 어떻게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고려말 공자의 53세손 공안의 둘째 아들 공소가 공민 왕비인 노국공주가 고려에 들어올 때 함께 오면서 고려에 귀화했다. 이때 창원 땅을 받아 창원 공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공서린 선생이 별세한 이후 이곳은 몇백 년 동안 폐허로 변했는데 정조가 머지않은 수원에 화성을 건설하면서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정조는 조선 후기의 개혁군주이긴 하지만 유학에 통달하고, 문체반정 등 여러 가지 조치를 통해 유교를 더욱 숭상하고자 하는 의지도 있었다.
정조는 빈터에 대사당을 짓게 하고 이곳의 지명을 궐리로 고치게 했으며(현재의 궐동) 친히 사액을 내리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또한 창원 공씨였던 성씨를 공자의 도시 곡부(취푸) 이름을 따서 곡부 공씨로 변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