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수용소의 '행복'을 말했던 사람, 그 이유가

[서평] 임레 케르테스, '운명', 민음사

등록 2021.10.28 15:37수정 2021.10.28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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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 임레 케르테스, <운명>
책제목임레 케르테스, <운명>조현행
 
살면서 힘든 일을 겪을 때, 이것은 '운명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운명에 기대어서라도 갑작스레 맞닥뜨린 인생의 파고를 어떻게든 넘고 싶은 마음의 발로일 테다. 운명이라는데 어쩔 것인가. 이렇게 운명이라는 말에는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해주는 포용과 위로가 담겨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운명을 긍정하게 된다.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에서도 삶에서 벼락같이 몰아치는 '운명'에 맞서는 한 소년이 등장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사는 14살 소년 죄르지는 버스를 타고 가던 중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에 의해 유대인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지옥과 같은 수형 생활을 하게 된다.


짐작하듯이, 강제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참혹했다. 사람들은 고된 노동과 폭력, 착취로 하나둘 쓰러져갔다. 병들어서 죽고, 굶주림으로 죽고, 가스실에서 죽어갔다. 주인공 죄르지 또한 살이 패이고 잘려 나가는 고통을 겪다 병원으로 실려 가면서 삶의 벼랑 끝에 서게 되는 상황을 맞는다. 그러나 다행히도 죄르지는 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기적처럼 살아남아 1년의 수용소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집으로 돌아오자 사람들은 죄르지의 주변으로 모여들어 수용소 생활의 참상을 말하라고 재촉한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는지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죽어 나갔는지를 증언하라고 종용한다. 그러나 죄르지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으로 주변 사람들을 당황케 한다.

"저는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이 끔찍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가스실 굴뚝 옆에서의 고통스러운 휴식시간에도 행복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강제 수용소의 생활이 끔찍하지 않았다니.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죄르지의 말에 깜짝 놀라다 못해 이내 화를 내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죄르지에게 듣고 싶었던 말은 '고통에 대한 증언'이었지만, 죄르지는 오히려 강제 수용소의 끔찍한 생활 속에서도 소소히 피어나는 행복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한다.

삶을 덮쳐오는 거대한 '운명'이 아니라, 그 안에서 발견되는 희미한 기쁨 말이다. 그 안에서도 분명 행복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죄르지는 증언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볼 수 없고, 찾으려고 하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아주 작은 행복이다. 그 작은 것들이 모여 그렇게 큰 '운명'을 버텨내는 힘이 되었으리라.


강제 수용소에 끌려간 일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지만, 그 운명에서조차 죄르지는 자신이 할 수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물레를 돌려 실을 뽑아내는 것과 같은 새로운 경험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달리 살아보는 일이며, 새롭게 살아보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임레 케르테스가 보여주는 '운명'에 대한 작은 통찰이다.

임레 케르테스의 소설 <운명>의 원제목은 '운명 없음'이다. '운명'은 강제수용소에서 의사가 죄수를 가스실로 보내 죽음을 맞이하게 할지 노동의 현장으로 보내 살려줄지를 결정하는 1초의 찰나와 같은 순간이다. 그런 점에서 죄르지에게 운명이란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운명' 앞에 닥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죄르지처럼 그 안에서 작은 삶의 의미를 찾는 일밖에 없으리라.


그것은 "도저히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은 삶을 지속해 가겠다는 각오"이다. 이렇게 소설은 고통스러운 '운명'을 견뎌내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소소하고 작은 행복을 조명해서 보여준다. '운명'에는 어둠만 있는 게 아니라,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작가의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

운명

임레 케르테스 지음, 유진일 옮김,
민음사, 2016


#임레 케르테스 #운명 #강제수용소 #유대인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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