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진씨 가족의 안타까운 사연을 담은 여성동아 1988년 12월호 기사. 1983년 동아일보 기사와 대조된다.
여성동아/강영미(김병진씨 아내) 제공
이 사건에 연루되어 참고인으로 보안사의 조사를 받았던 백아무개씨도 "김병진 간첩사건이 보도되었을 때 내가 제주도에서 운영중이었던 OO 목석원이 큰 타격을 입었다. 나와 고OO 등이 포섭 대상자로 보도되는 바람에 목석원을 찾는 관광객도 많이 줄어들었다. 처 김O자도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라고 하였다(2009. 10. 9 진화위).
보안사 발표 내용이 언론에 보도된 날짜는 1983년 10월 19일이다. 이 날은 김병진씨가 검찰에 송치되기도 전이었으며 구속영장이 발부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검찰 송치 2일 전에 신문과 방송을 통해 김병진씨의 피의사실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발표된 것이다.
보안사가 형법 제126조 공판 청구 전 피의사실 공표 금지 및 형사소송법 198조 비밀 엄수, 피의자 및 다른 사람의 인권 존중 주의사항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사실 확인 없이 방송과 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는 점이다. 언론은 사건 내용에 대한 사실 확인이나 검증 없이 보안사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보도했다는 점에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당시 '민단으로 위장' 했다거나 '시위를 선동하였다'고 한 언론 보도는 보안사의 의견서나 공소장에 기재되지 않은 내용이다. 보안사는 공소장에도 없는 내용을 보도자료에 실어 배포했고 언론은 확인되지 않은 출처가 불분명한 사실을 보도해 피의자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겼다.
83년 10월 19일 남편이 교포 간첩으로 보도되던 날, 남편은 나와 함께 사실 유무를 확인하는 전화를 받으며 뉴스 시간마다 비쳐지는 '유학생을 잡으로'라는 텔레비전 프로를 안방에 앉아서 지켜보았다. 이 뉴스가 있기 전 수사관들은 남편이 흐린 화면에 목소리가 변성되어 텔레비전에 나갈 것이니 그리 알라는 전화를 해왔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남편은 얼굴까지 화면에 비쳐지며 '간첩'으로 보도되었다. 그들은 항의하는 나에게 '사람들은 얼마동안의 기간이 지나면 전부 잊어버리니 그까짓것 조금만 참으시오'라고 말했다 '그까짓것'이라니 기가 막혔다. (여성동아 1988년 12월호)
'그까짓것'이라고 취급된 '간첩 조작'은 결국 그까짓것이 아닌 일이 되어 버렸고, 그 뒤로 김병진씨와 그의 가족은 어디에서도 발 붙이고 살 곳이 없었다. 이 언론 보도로 한국에서는 더는 있을 수 없어 86년에 도피하다시피 일본으로 왔지만 보안사에서 강제적으로 2년여간 근무했다는 이유로 일본에서는 보안사 스파이로 의심받아야 했다.
주위의 멸시와 냉정을 몸으로 직접 느끼며 나는 딸을 출산하는 고통보다도 더 아픈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인 시달림을 겪게 되었다. 모든 친구와 선후배, 하물며 집안 친척들까지도 나와 남편에게 등을 돌렸고,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여성동아 1988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