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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제도 개선,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다

[직업성 암 파헤치기 ①] 직업성 암 현실과 과제

등록 2021.11.15 13:27수정 2021.11.15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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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다양한 직종 노동자들이 직업성 암 집단산재 신청을 하며 지금까지 알려지지 못 했던 직업성 암 문제를 드러내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노동자들이 암이 업무의 문제 때문에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치료 및 보상받는 데 어려움이 있다.

최근 다양한 직종 노동자들이 직업성 암 집단산재 신청을 하며 지금까지 알려지지 못 했던 직업성 암 문제를 드러내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노동자들이 암이 업무의 문제 때문에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치료 및 보상받는 데 어려움이 있다. ⓒ 전국금속노동조합


직업성·환경성 암환자 찾기 119(이하 직업성암 119)는 지난 3월 24일 '우리나라 직업성암 실태와 개선방안 토론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노동조합과 함께 4월 28일 직업성 암환자 찾기 운동을 선포하면서 78명의 대규모 집단 산재 신청을 했다. 직업성암 119를 통해 9월까지 접수된 암환자는 141명이다. 2019년 직업성 암으로 인정된 사건이 286건, 2020년은 335건임을 볼 때, 엄청난 숫자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주축이 되어 직업성암 119를 조직한 것은 단순히 직업성 암이라는 질병에 대한 산재신청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작업환경의 개선, 노동조합의 활동, 법 제도의 구축, 산재보상 법 제도의 개선 등 다양한 대책과 과제가 복합적으로 놓여 있다.

몇 달 전 포스코 직업성 암 문제를 효과적으로 밝혀낸 바 있고, 플랜트 직업성 암, 학교급식 노동자의 직업성 암 문제를 넘어 사회 전반에 걸친 노동자의 직업병 문제에 대한 질문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직업병으로서 암환자 찾기 및 제도 개선과 더불어 현재는 환경성 암환자 찾기에도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10여 년간 반올림의 헌신적인 직업병 투쟁이 있었지만 여전히 직업성 암은 일부 직종에 국한된 특별한 경우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한해 암환자 수는 20만여 명이고, 직업성 암환자 비율은 전체 암환자의 2~5%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직업성 암환자 추정치인 4000명의 절반인 2000명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1000명의 노동자가 직업성 암을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산재로 보상되어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의 작업환경과 직업병 문제가 지속되고 있음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 직업성암 119가 이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이런 문제의식이다.
     
직업성 암 산재신청, 노동자에겐 곳곳에 장벽이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포스코 노동자의 직업성 암 산재 인정 투쟁에 함께 했다. 회사의 강압적이고 전근대적인 노무관리와 이에 협조한 노동조합으로 인해 포스코 노동자의 직업성 암은 30년 이상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다행히 우리 사무실에서 담당한 폐암과 특발성 폐섬유화증이 산재로 인정되었다. 포스코의 직업성 암이 사회적 공론의 장으로 나올 때까지 포스코 자본은 왜곡과 부정을 일삼았고, 금속노조 포스코 지회를 비난했다. 또한 이를 심층 보도한 포항 MBC 기자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철회하지 않았다.

2016년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내 소재공장에서 전기보전 업무를 담당하는 한 노동자에게 발생한 '다발성골수종' 사건의 상담을 부탁받은 적이 있다. 노동자는 산재신청을 거부했고, 3번의 설득 끝에 산재신청에 동의했다. 회사의 눈치와 관리자들의 압박에 "산재신청은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라는 명제를 설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전에 자동차 소재공장에서 근무한 노동자가 백혈병으로 산재로 신청한 적도, 인정받은 적도 없어 노동자를 설득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2018년 5월 대한항공에서 20년간 근무했던 노동자의 유방암 사건을 산재로 신청했다. 항공기 승무원의 직업성 암 사건으로 최초로 신청한 사안이었고, 2021년 7월 산재로 승인받았다. 역학조사 결과서에는 "20년 2개월 동안 노출된 방사선과 주야간 교대근무, 불규칙한 비행주기로 인한 생체리듬의 부조화 등으로 발생하였다"고 했다. 이 사건을 처음 담당하게 되었을 때, 사건의 어려움으로 이대목동병원 김현주 교수님께 업무관련성평가서를 의뢰했다. 여러 문헌과 자료 등을 검토했고, 어렵게 산재신청을 했다.

노동자들이 산재를 신청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질병과 업무와의 관련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인식부족 때문이 아니라 회사의 안전교육이나 노동조합 교육 중에 이를 제대로 알리는 과정이 거의 없음에 기인한다. 수박 겉핥기식 안전보건교육 시스템과 유명무실한 안전보건 체계를 바꾸어야 한다. 작업환경측정, 물질안전보건자료(MSDS) 제도가 노동자들의 인식과 환경개선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반성적 고민이 필요하다.


유해물질이나 작업환경은 개선되거나 변해왔다. 그런데 사건을 진행해보면 과거의 열악한 환경이나 물질에 대한 데이터나 연구결과가 별로 없다. 현대자동차 산재사건도 오래 전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에서 발암물질에 대한 연구 사업을 의뢰했고, 2014년 노동환경연구소에서 "현대자동차 발암물질 사용이력 조사사업보고서"라는 체계적인 보고서를 작성해놓았기 때문에 논리 구성이 가능했다.

다행히 아산공장 노동자의 '다발성 골수종'은 2017년 6월 서울판정위원회로부터 "전기보전 업무로 인한 고농도 벤젠 노출과 20년 이상 저농도 포름알데히드 노출"로 인한 업무상 질병임을 인정받았다. 이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소재담당 노동자의 다른 백혈병도 산재로 승인받을 수 있었다. 또한 이 두 사건의 영향으로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의 소재담당 노동자의 백혈병도 산재로 인정되었다.

절실한 산재 판정시스템 재구축

직업성 암 산재신청의 또 다른 방해요인은 너무 긴 역학조사 기간과 잘못된 판정 시스템이다. 위 대한항공 노동자의 유방암 사건은 역학조사와 산재 판정에 3년 2개월이 소요되었다. 최근 자료에 의하면,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역학조사(전문조사)를 하는 데 걸린 일수는 2019년 513일, 2020년에는 438일이다. 직업환경연구원은 2019년 206일, 2002년은 275일이다.

3년 2개월이 이례적으로 길긴 하지만, 역학조사에 소요되는 기간은 평균 1년이 넘는다. 조사와 판정이 지체되는 기간 동안 산재신청 노동자는 불충분한 치료와 불안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텨야 한다.

더욱 문제인 것은 잘못된 산재판정 시스템이다. 산재판정은 자연과학적 인과관계를 다투는 것이 아니라 법리적 상당인과관계에 대한 판단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역학조사평가위원회나 판정위원회는 전자에 근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원 판결에서 역학조사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역학조사와 이에 근거한 인정방식을 버리지 못하는 판정시스템에 대해서는 비판이 부족하다. 전문가주의와 과학적 인과논리가 아닌 산재보험법의 법리에 기인하는 절차와 판정시스템의 재구축이 필요하다.

또한 사업주의 강압적 노무관리와 산재신청에 대한 기피 및 방해가 여전히 현장의 가장 큰 난제라고 할 수 있다. 보험가입자 의견서와 문답서를 통해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많은 사업주가 역학조사를 나온 연구원들에게 사업장이나 유해물질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아 조사가 부실해지고, 이는 결국 산재 불승인으로 이어진다.

근로복지공단이나 역학조사기관의 자료요청에도 비협조적이다. 핵심 자료인 MSDS나 작업환경측정결과 등을 영업비밀 등의 사유로 일부만 공개한다. 산재조력의무에 대한 처벌규정이 없는 현실적 제도를 악용하여 산재은폐 및 방해 행위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산재보험소견서 발급을 거부하는 의사도 문제다. 일부 혈액종양내과, 호흡기내과 의사들의 산재보험소견서 작성 기피행위는 노동자의 산재신청 좌절로 이어진다. 제도적으로 치료기간이 명시된 진단서나 소견서로 대체할 수 있게끔 변경되었지만, 이를 잘 알고 있는 노동자들은 거의 없다. 여전히 산재가 전문적인 영역에 있다고 잘못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악용하는 회사와 브로커, 노무사들이 판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어렵게 산재신청이 승인되어도 산재보험 비지정의료기관에서는 기본적으로 치료받을 수 없다. 산재 환자는 산재보험 지정의료기관에서 치료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지정의료기관에서 치료하던 산재가 승인되면 공단은 지정의료기관으로 옮기라고 강제한다. 노동자들이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병원을 찾아 옮겨야 하는 고통이 수반된다.

한 걸음씩 내딛는 걸음, 제도 변화 가능성으로

2018년 8월부터 반도체 디스플레이 종사 노동자에게 발생한 8개 상병(백혈병, 다발성경화증, 재생불량성빈혈, 난소암, 뇌종양, 악성림프종, 유방암, 폐암)을 일정한 조건 (1) 입사 및 퇴직 시기: 2011.1.1. 이전 입사자 중 1996.1.1. 이후 퇴직자, (2) 재직기간: 1년 이상, 3) 발병 시기: 퇴직 후 10년 내이 있는 경우 역학조사를 생략해서 업무관련성을 추정 판단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2019년 2월부터 "직업성 암 업무상 질병 업무처리요령"을 통해 '① 석면에 의한 원발성 폐암 ② 석면에 의한 악성중피종 ③ 탄광부·용접공·석공·주물공·도장공에 발생한 원발성 폐암 ④ 벤젠에 노출되어 발생한 악성림프·조혈기계질환은 업무상질병 자문위원회 자문을 거쳐 업무관련성 전문조사(개별역학조사) 생략'하고 있다.

또한 근로복지공단은 2021년 1월부터 "산재판례서비스"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또한, 직업환경연구원은 2021년 7월부터 홈페이지 알림마당을 통해 전문조사사례와 보고서를 게시하고 있다.

노동부에서 반도체 디스플레이 사업장의 역학조사 생략과 2019년 2월 "직업성 암 업무상 질병 업무처리요령"을 제정·운영한 것은 사실상 반올림 투쟁으로 된 것이나 다름없다. 산재판례서비스 개설과 전문조사 공개도 고용노동개혁위원회의 권고안을 이행한 것일 뿐이다.

이것이 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의 적극적인 행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단순히 사례 위주의 나열이 아니라 직업병 노출 매트릭스를 구축하여 공개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직업병 접근이 쉽도록 개선해야 한다.

직업성암 119가 광화문에서 운동을 선포한지 불과 6개월도 되지 않았다. 학교급식 노동자들의 폐암이 사실상 추정의 원칙으로 산재로 승인되고, 열악한 노동환경이 여러 차례 심도 있게 조명되었다. 이로 인해 학교 급식실의 노동환경 개선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얼마 전 국정감사에서도 이 문제가 다루어진 바 있다.

직업성암 119가 목표로 한 것은 암환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넘어선 제도적 개선과 노동자를 포함한 시민 인식의 개선과 확산이다. 특히 제도적 개선은 4가지 법안의 제정과 개정에 집중하고 있다. 첫째, 병원을 통한 직업성 암환자 감시체계 구축이다. 산재신청 주체를 재해자 본인만이 아닌 산재보험 의료기관과 의사, 사업주 등으로 확대하여 산재신청이 용이하게 해야 한다.

30%대에 머무르고 있는 산업재해 요양 신청율을 높이기 위해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이 필요하다. 더불어 진료기록부 기록내용을 확대하는 개선도 필요하다. 현행법에 따르면 의료인이 환자의 주된 증상, 진단 및 치료 내용 등을 진료기록부에 기록하게 되어 있다. 여기에 직업력까지 추가하게 해야 한다.

둘째, 적용기준을 확대한 직업성 암 추정의 원칙 법안의 제정이다. 셋째, 대상물질 확대와 노출기준이 적용된 건강관리수첩제도 개정이다. 건강관리카드 발급 대상물질을 최소 특별관리대상물질 37종, 장기적으로 국제암연구소가 규정한 1급 발암물질 121종까지 확대하는 것과 작업자로 한정되어 있는 신청 주체를 사업주까지 확대하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이 필요하다. 넷째, 노동자 알권리 보장을 위한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이다.

네 가지 제도 개선 중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다. 개별 노동자의 직업성 암 보상만이 아니라 현장과 노조를 넘어 사회적 연대를 구축해야 가능한 과제일 수 있다. 이제 잠시 첫발을 내딛었을 뿐이다. 1년 아니 10년 싸움이 새롭게 시작된 것이다.
덧붙이는 글 직업성·환경성 암환자 찾기
전화: 02-490-2091
메일: nocancer119@gmail.com
사이트: http://www.nocancer119.co.kr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이자 노무사이신 권동희님이 작성하였습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일터> 11월호에 연재한 글입니다.
#직업성암 #산업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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