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씨의 사망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 1987년 1월 27일 자 보도
동아일보
김옥분 여인 아파트서 변시로
홍콩 납북미수 사건 윤태식 씨 부인 김옥분 여인 아파트서 변시로
홍콩경찰 '지난 10일 이전 피살된 듯'
지난 2일 밤 '홍콩' 구룡 '침사추이'가 13a 약복아파트 9층에 있던 집에서 조총련 공작원 2명을 만난 후 행방불명 됐던 김옥분(34 일명 수지김)이 26일 밤 자신의 아파트에서 숨진 변시체로 발견됐다.
변시체로 발견된 김 부인의 남편 윤태식 씨(28. 서진통상해외사업부 홍콩본부장)는 지난 4일 '싱가포르'에 가서 '아내가 행방불명됐다'며 자신은 '북한의 납치기도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다'고 주장, 한국대사관에 보호를 요청했었다.
- 동아일보 1987. 1. 27 11면
그러나 이날 이후 더 이상 김씨의 죽음에 대한 기사는 신문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홍콩 수사당국은 김씨의 사망 시점이 1월 10일 이전이라며 한국 정부에 그녀와 동거했던 윤씨에 대한 조사 협조를 요구했다. 그러나 홍콩 수사당국의 이러한 요청에 한국대사관이나 외무부는 일절 응하지 않았다. 결국 윤씨는 어떤 조사도 받지 않게 되었다.
수지 김 사건을 공안사건으로 규정했던 안기부는 납치 주범 중 한 사람이었다는 김씨의 사망에 대해 당연히 수사해야 했다. 만약 실제 김씨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공작원이었다면, 윤씨를 납치하려했던 경위, 과정, 그리고 무엇 때문에 사망하게 되었는지를 조사해야 했다.
이때 조사했다면 뒤에 가서 말하겠지만 남편 윤씨의 살해 혐의도 밝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기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지 김 사건을 공안 정국으로 몰고 갔으며 사망한 김씨의 가족들을 불러 가혹 행위를 포함한 강도 높은 조사를 했다.
언론 역시 수지 김을 악마화 하는 것에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도 정작 이 여인이 죽은 경위에 대해서는 취재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김씨의 시신은 행불자를 처리하는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이름 모를 이들과 함께 묻히게 되었고 이후 그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수사당국의 비인권적 조사를 받고 전과자의 가족이 되어 버렸다.
이 사건의 전말은 2000년이 되어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드러났다. 윤씨가 집에서 다툼 끝에 아내 김옥분씨를 살해했으며, 당시 안기부는 윤씨가 김씨를 살해했고 북에 납치될 뻔했다는 진술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실을 은폐하고, 오히려 윤씨를 반공투사로 미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안기부는 살해당한 김씨가 북한 간첩이라며 단순 살인사건을 대공사건으로 조작했다.
결국 윤씨는 2001년 11월 13일 살인 혐의로 구속됐다. 재판에서 윤씨는 1987년 1월 2일 홍콩의 자택에서 사업자금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던 중 부인 김옥분을 살해한 사실이 인정되어 징역 15년 6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윤씨의 살인을 알고도 방조했던 안기부장 장세동 등은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직권남용죄와 직무유기죄에 대해 '공소권 없음' 처분을 받아 처벌을 면했다.
법원은 김씨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42억여 원의 배상 판결을 결정했다. 정부는 이에 대한 일부 금액을 당시 이 사실을 은폐했던 장세동 안기부장 등에게 구상권을 청구하는 방식으로 환수 조치 했다(한국 정부가 구상권 행사한 첫 사례이며 이후로도 행사한 사례는 없다).
국가 배상 판결이 났지만 이들의 피해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었다. '수지 김 사건'으로 알려진 후 가족들은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특히 언론 보도 이후 이들이 '여 간첩'의 가족으로 받아야 했던 피해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