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호 씨 명함그가 내민 명함에는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활동가’라고 적혀 있다. 대표가 없는 네트워크 조직이라 특정 사람에게 집중되거나 흔들리지 않고 지금까지 활동이 이어져 온 비결이 아닐까 싶다.
나익수
"1994년 인천여상(여자상업고등학교)으로 복직했는데, 졸업생들이 은행에 취직하려면 '키 163센티미터 이상, 몸무게 53킬로그램 이하'라는 조건을 통과해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요. 여성민우회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죠. 여성민우회 이름으로 함께 자그마치 44개 기업을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으로 고발했어요."
1992년 하인호씨는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되었다가 1994년에 복직했다. 고발을 계기로 현장실습을 통해 학생들이 겪는 차별과 성폭력, 임금차별 등 갖가지 문제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교사들을 만나고 단체를 만나 의견을 듣기도 하고 뜻을 모으기도 했다. 전교조 안에서 실업교육 분과를 맡아 실업계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직업교육, 노동인권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공부하고 교사들과 연구도 했다.
2002년, 전교조에 처음 생긴 실업교육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실업계 고등학교 현장실습의 문제를 사회에 널리 알려 변화를 가져오고 싶었다. 당시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가 주최한 '청소년 노동의 실태와 문제'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여했다. 청소년 아르바이트가 주요 주제인 토론회 자리에서 하인호씨는 '청소년 아르바이트뿐만 아니라 실업계 고등학교의 현장실습도 문제가 심각함'을 알렸다.
하인호씨는 토론회를 계기로 참여연대와 함께 현장실습 개선 캠페인을 시작했다. 올해 일반고 학생이 96만여 명인 데에 견주어 특성화고(실업계고) 학생은 20만 명이 채 못 된다. 그만큼 특성화고 학생들의 삶은 각종 매체가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렇듯 현장실습 중 목숨을 잃은 사건은 어느새 잊혀 간다.
똑똑, 노동인권교육 하실래요?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 현장에 가서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떻게 일할까 굉장히 궁금했죠. 그러다 전교조가 생기고 교육 운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현장 노동자들 만날 기회도 많아졌어요. 교사라고 하니까, 그것도 특성화고 교사라니까 노동법 이런 거 좀 가르쳐야 한다 그래요. 그걸 숙제로 안고 있었죠."
'참교육'을 알게 되면서 학생들에게 체벌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렇다고 당장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어려움이 있을 때면 여전히 목소리는 위압적이고, 말투는 위협적이고, 지도는 강압적이었다. 몸에 밴 폭력성을 씻어 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예비 노동자인 학생들에게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3권을 가르쳐야 한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공감은 했지만 실천에 옮길 엄두가 나지는 않았다.
"학교에서 '노동'을 교육하기까지는 못했어요. 노무사에게서 노동법 강의를 듣고, 실천 사례를 함께 나누고 했지만 쉽지 않았죠. 현장실습과 취업을 나간 뒤 어려움을 호소하는 청소년에 대한 안타까움과 도움을 주고 싶다는 동정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만 해도 역시 청소년을 지도의 대상으로 놓고 노동, 노동권, 노동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죠."
고민이 쌓여 가던 2004년, 인권운동사랑방이라는 단체의 배경내씨가 찾아왔다. 청소년이 노동인권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노동권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 낼 수 있도록 교재를 만들자고 했다. 청소년 단체들과 1년 6개월을 부대끼며 연구하고 토론하면서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를 만들고 이 단체 이름으로 <똑똑, 노동인권교육 하실래요?>를 펴냈다.
이 과정에서 청소년 노동인권학교를 열고, 교사 및 교육 활동가를 위한 노동인권교육 워크숍을 마련하고, 실업계고 현장실습 실태조사를 하며 현장실습이 정상화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