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청소일 하는데요? 표지
21세기북스
<저 청소일 하는데요?>의 작가 김예지는 학창 시절 누군가 장래희망을 물으면 '디자이너'라고 대답했다. 그에 맞는 공부를 했고 대학도 원하는 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그녀를 '작가로서' 찾아주는 곳이 없었다. 지원했던 회사에서도 모두 거절당했다. 생활비가 필요했던 그녀는 어머니와 같이 청소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참고로 만화책이다), 작가는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수입과 무관하게 꾸준히 그림을 그렸고, 그러다 청소 일을 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다. 스물여섯 젊은 여자가 청소 일을 할 때 사람들이 그것을 꽤 특이하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원래 가던 길을 가지 못한 그녀의 인생은 실패한 걸까. 이 책을 보면 전혀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작가는 청소 일을 통해 벌어들인 넉넉한 수입을 기반으로 자기 시간을 확보했고 그 시간에 하고 싶은 일을 했다. 돈은 청소로 벌고 성취감은 그림으로 채웠다.
하지만 그녀는 문득문득 스스로 위축되었다.
학창 시절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요"라는 말을 지키지 못한 것이 내심 마음 쓰였을까. 만약 작가가 "어떤 일이 하고 싶니?"라는 질문을 받았다면, 그래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다면 어땠을까.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았을까?
어른이 된 작가는 새로운 질문을 감당해야 했다.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이었다. 작가는 일단 당황했다. 사실 질문의 의도만 보면 '직업'을 묻는 것이기에 청소 일이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그렇게 대답하면 뒤이어 부가 설명을 해야 했다. 일러스트레이터라고 대답하면 질문자가 금방 이해했지만 사실 그 일이 수입을 주는 것은 아니기에 정확한 답은 아니었다.
친구들을 만날 때도 고민은 이어졌다. 친구들이 "요새 뭐해?"라고 물었을 때, 청소 일을 한다고 솔직히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느라 우물쭈물했다. 찰나의 순간 부끄러움도 느꼈다. 그러다 솔직히 대답하면 친구들은 순간 멈칫하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작가는 구구절절 사연을 설명해주었다.
작가는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에 변명하듯 설명을 해줘야 했을까. 그렇다. 대졸 20대 여성이 청소 일을 하는 건 일반적이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번듯한 대기업에 입사한 사람들은 "왜 거길 갔어?" 하는 질문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청소 일은 하는 20대 노동자는 남을 이해시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도대체 어떤 설명을 해야 할까. 내가 회사에서 발탁되지 않은 이유? 누구도 내게 작품 의뢰를 하지 않는 이유?
직업이라는 개념 안에는 단순히 돈벌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 자아실현, 안정성 확보 등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청소 일은 이러한 의미가 싹 지워진다. 오직 돈벌이로서 이해된다. 그래서 청소 일을 향하는 젊은이를 바라볼 때 사람들은 선입견을 버리지 못한다. 왜? 누구도 청소 일을 원해서 하지 않을 테니까. 그것도 배울 만큼 배운 젊은 여자라면 더욱이.
삶의 의욕을 잃었을 때 작가는 상담사를 찾아갔다. 작가는 "선생님, 저 청소 일이 너무 하기 싫어요"라고 말했다. 상담사는 "그럼 왜 하고 있죠? 예지씨가 선택한 이유가 있을 거잖아요."라고 물었다. 작가는 뜨끔하며 자신이 뭘 잊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작가에게 청소 일은 생계를 책임져 주는 완벽한 직업이었다. 청소 일을 하면서 살림이 넉넉해졌고, 일하는 시간을 자유롭게 조율할 수 있었고, 이러한 요소는 그림으로 자아실현을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상담사의 말처럼 작가는 필요에 따라 청소 일을 선택했고, 청소 일은 그 필요성을 충분히 채워주었다.
원하는 직업을 가지는 것도 멋진 일이지만, 생계를 담당한다든지 안정을 담당하고 있는 직업이라도 가치 있는 노동이란 건 변함이 없다. 꿈의 카테고리 안에 작은 부분일 뿐 다른 부분들로도 꿈은 충분히 채워질 수 있다.
작가는 책을 낸 후 강연을 다녔다. 한 고등학생은 '남의 시선을 어떻게 이기나요?'라고 물었다. 작가는 이기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저 견뎠다고 했다. 그런데 이기는 것보다 견디는 것이 더 대단해 보이는 건 왜일까.
남들의 시선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렇다고 완벽히 무시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다. 분명 마음에 타격을 입힌다. 하지만 그 시선을 이기지 못했다고 해서 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마음이 불편하지만 꿋꿋이 내 선택을 믿고 나아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세상에 세상의 선입견과 편견을 완벽히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저 견디며 포기하지 않는 것, 그렇게 비기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대견하게 여겨도 되지 않을까? 참고로 작가는 책을 낸 이후로도 계속 청소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작가가 세상과 겨루는 가위바위보가 쭉 이어지기를 응원해본다.
저 청소일 하는데요? - 조금 다르게 살아보니, 생각보다 행복합니다
김예지 지음,
21세기북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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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해지고 싶으면서도 다른 사람과 달라지는 것에 겁을 먹는 이중 심리 때문에 매일 시름 겨운 거사(居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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