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교환원초창기 전화 교환원은 주로 남성이 맡았음. 여성 교환원은 비교적 뒤에 등장한 점으로 미루어 일제강점기 사진으로 추정.
국립중앙박물관
초창기 전화는 주로 장거리 시외전화로, 선박에 의존하던 해외 교역으로 서울 관문인 인천항을 특히 중요시했다. 따라서 제반 통신과 전화가 인천에 집중되었음은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1902년 서울∼개성에 이어 개성∼평양 간 전화가 개통되고, 이듬해 서울∼수원이 개통된다. '한성전화소' 산하엔 마포·도동(동대문)·시흥(영등포)·경교(서대문) 지소를 개설한다.
일반인이 전화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02년으로 서울 2인, 인천 3인에서 1903년 서울 16인, 인천 14인으로 늘어난다. 1905년에 이르러 서울 50인, 인천 28인, 수원과 시흥 각 1인 등 모두 80인이었다.
빼앗긴 정보통신 주권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한국이 일제에 빼앗긴 건 이뿐만이 아니다. 철도 중심의 교통 주권과 화폐·재정권을 빼앗겼고, 거기에 더해 '한일통신기관협정'을 통해 정보통신 주권마저 빼앗겨 버린다. 기존 한국의 통신시설이 송두리째 장악당한다. 통신원을 폐지하고 통감부 산하에 '통신관리국'을 두어 한국 정보통신 산업을 떡 주무르듯 한다.
일제는 기왕에 불법으로 진출한 71개 일본 우편국을 최대한 활용한다. 아울러 이들이 취급하던 우편저금과 우편환을 그대로 적용한다. 일제는 막대한 전비(戰費)를 적자 공채 발행으로 충당하고 있어 이를 메우기 위해 우편국 금융을 활용, 바닥까지 박박 긁어 서민들 주머니마저 털어내는 전술을 편 것이다. 강압적으로 저축을 강요하던 풍습은 이때 시작되어 1970년대 개발독재까지 이어진 구습이다.
1910년 강제 병합 후 총독부 '통신국'은 전기통신·해운·기상관측·가스(Gas) 업무까지 관장한다. 1912년 통신국을 '체신국'으로 바꾸면서 기상관측을 떼어 내무부로 이관시킨다. 1919년에는 선원양성소인 '해원양성소'를 인천에 세워 1927년 진해로 이전시킨다. 전력 에너지 공급이 시급해지자 1923년 수력발전 업무를 전담하는 '임시수력조사과'를 체신국 내에 두기도 한다.
우편국에서 우체국까지
일제는 1905년 우체사와 전보사를 합해 '우편국'으로 개편하는 한편, 1906년엔 우편·전신·전화는 물론 통신 업무 전반을 수행하게 한다.
강제 병합 후 조선총독부는 '조선총독부 통신관서 관제'를 통해 이를 재정비한다. 전신·전화 취급 여부에 따라 '우편국과 우편소'로 이원화한 조직을 전국에 촘촘하게 심는다.
1906년 기존 업무에 국고금 수취와 저축업무까지 곁들인다. 이를 통해 효율적인 식민 통치는 물론 빈발하는 각 지역 의병을 탄압하고, 아울러 군수산업에 필요한 자본축적이라는 목적을 충실히 수행할 기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편국 수는 줄고 소규모 우편소는 증가한다. 이는 순전히 일제의 침략성 때문이다. 일제는 중국 침략 준비를 위해 일본과 만주를 연결하는 통신망 확장에 열중한다. 이는 곧장 군·경찰 통신시설 확장으로 이어지고, 일반인이 이용하는 공중통신과 우체국 망 확충은 뒷전으로 밀린다.
그러함에도 공중용 통신시설 확충은 식민지 통치기반 강화에 필수 요소였다. 이는 치안유지를 통한 의병 탄압 및 반대 세력 제거와 직결된다. 따라서 공중용 통신시설 고도화는 강압적 식민 지배와 밀접한 관계였다. 게다가 1910년을 전후해 이주 일본인이 크게 늘어, 그들의 통신 수요도 급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