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대신 살아볼 때 보이는 것들

[서평] 김남희 지음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살아보기'

등록 2021.12.11 20:02수정 2021.12.13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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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살아보기' 표지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살아보기' 표지웅진지식하우스
 
누군가는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누군가는 새로움을 향한 강한 열망과 호기심을 품고 여행을 떠난다. 목적이야 어떻든 여행자의 마음가짐은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행자에게 관광지인 곳이 현지인에게는 일상의 장소이다. 이러한 차이를 인지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여행자가 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충족감은 질적으로 달라진다.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살아보기>의 저자 김남희의 글을 보면 여행을 다닐 때 발끝으로 살금살금 다니려는 마음가짐이 투명하게 엿보인다. 그 덕에 작가는 어느 여행지를 가든 풍경의 일부가 되었고 현지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었다.

작가는 여행자이기 전에 산책자이다. "발리에서 두 달이나 뭘 할 거야?"라는 질문에 "매일 산책을 할 거야"라고 대답할 정도다. 얼마나 산책을 좋아하는지 하루라도 산책을 하지 않으면 의무를 방기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산책은 문명이 앗아간 몸에 대한 주도권을 회복하는 일이다. (…) 여행지에서의 목적 없는 산책이야말로 내가 그 낯선 도시와 사귀고 정들고 작별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하지만 발리의 우붓에서 작가의 기대는 와르르 무너졌다. 아무리 산책에 너그러운 작가라도 그곳은 산책하기 너무도 어려운 동네였다. 보도의 개념이 없어서 차와 오토바이가 질주하는 사이를 요령껏 지나가야 했다. 바닥도 온전하지 못했다. 망가진 보도블록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산책을 향한 작가의 집념은 끈질겼다. 결국 괜찮은 산책로를 찾아내었다. '길 양쪽으로 드문드문 보이는 집들, 발목을 간질이는 풀의 감촉, 오직 발을 가진 동물만이 접근할 수 있는 길, 저 언덕 끝에 무언가 나를 기다릴 것만 같은 풍경'이 공존하는 숲길이었다.

아무리 노동시간이 길어도 운동을 따로 하지 않으면 살이 찐다. 모든 움직임이 곧 운동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걷는다고 다 산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이동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목적지가 없어야 속도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

속도가 느려지면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 말은 곧 지금, 여기에만 집중한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산책은 과거와 미래에게 각각 팔다리가 붙잡혀 고통을 겪는 현대인들에게 더없이 좋은 마음 치료가 아닐까 싶다.


발리가 아무리 여유로운 도시라지만 돈의 지배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작가는 발리가 관광도시로 기능하면서 아름다운 계단식 논 대신 호텔이 늘어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외국인으로서의 사고였다. 어느 발리인의 말을 듣고 작가는 그들이 '보기보다 영리하고 강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희 한국인들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면 여행 가는 데 쓰지? 우리는 돈만 생기면 종교의식에 다 써. 그래서 어떤 외국인들은 우리를 비웃지. 하지만 이런 걸 하지 않으면 외국인들이 발리에 오겠어? 발리가 다른 나라와 똑같아지면 누가 여기에 오려고 하겠어?"
 
너무도 부러운 마음가짐이다. 특히 '남의 시선'에 예민한 한국인으로서 말이다. 우리나라는 자국에서 국제 행사를 유치하기만 하면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그들의 기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어느 외국인, 특히 선진국 출신의 외국인이 한국의 어떤 문화를 비웃는다면 한국인들은 금방 수치심을 느끼고 그것을 뜯어고치려 할지도 모른다. 한국도 분명 한국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전통문화가 있는데 그 중 대다수는 경로 우대 차원에서 형식만 유지되는 실정이다.


무조건 크고 높고 반짝거리는 건물을 세워 '최초', '최대'의 수식어를 손에 쥐려는 우리나라와 달리, 발리 사람들은 수량적 비교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발리도 1970년대 개발 바람이 불었다. 그때 발리 사람들이 정부에 요구한 사항은 '야자나무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도록, 모든 건물은 전통 가옥의 구조를 따르도록 법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층수나 높이가 아니라 '야자나무'가 그들의 기준이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발리에는 3층 이상의 건물이 거의 없어 어디서나 논과 야자나무가 보인다고 한다. 발리인들은 크고 높고 화려한 건물 대신 야자나무를 택했다. 돈으로 따지면 비교도 안 될 만큼 초라한 그 야자나무를 말이다. 그런데 여행자들을 끌어당기는 발리의 매력이 바로 그 야자나무이다. 발리는 세계 그 어느 도시보다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냥 발리라서 매력이 있다.

잠이 많고 게으름을 즐기는 작가이지만 라오스의 루앙프라방에서만큼은 달랐다. 새벽 탁발을 보기 위해서이다.
 
어스름이 걷힐 무렵이면 주황색 가사를 걸친 스님들이 맨발로 일제히 걸어 나왔다. 그들이 걸어가는 거리에는 어깨에 띠를 두른 여인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작가는 스님들이 발우를 내밀고 여자들이 찰밥을 바치는 장면 속에서 '나와 타인의 목숨이 이어져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 도시의 새벽이 그 어느 곳보다 절절하고 환하다고 생각했다.

이 눈물겨운 풍경이 오염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어느 동양인들이 스님들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었던 것이다. 공양을 바치려고 앉아 있는 여행자들은 자기를 찍기 바쁘다. 꼭 이때가 아니더라도 작가는 계속해서 셀카봉을 든 이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여행지의 풍경이 아니라 풍경 속에 있는 '나'에게 집중했다.

그 옛날, 루앙프라방의 탁발은 여행자가 감히 끼어들 수 없을 만큼 신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루앙프라방이 관광지로 이름을 떨치면서 현지인보다 여행자가 많아졌고 다수는 소수를 배려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아끼고 기억하려는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자기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배경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좀 지나친 게 아닌가 싶다. 이럴 땐 '관광'이란 말이 좀 속상하다. 사람이건 종교의식이건 그저 볼거리로만 치부해버리는 것 같기에. 무언가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느끼러 가는 여행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

여행자로서의 태도를 한눈에 엿볼 수 있는 작가의 일화를 끝으로 글을 마무리하겠다. 작가가 장기 투숙을 하면서 집을 빌렸는데 그곳의 집주인이 일주일에 두 번 청소를 해준다고 했다. 그 청소라는 게 얼마나 간단한지 침대와 시트를 간 후, 커다란 빗자루로 바닥을 대강 쓸면 끝이다. 화장실 청소를 할 때에도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절대 애써서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게 15분 과정이다.

작가는 집주인이 '다했다'며 사뿐거리는 발걸음으로 나간 후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왜 작가는 집주인에게 항의하지 않고 손수 청소를 했을까? 우기가 지속되는 그곳은 덥고 습한 기후였다. 집주인이 여행자를 무시해서 대충 한 것이 아니라 꼼꼼히 청소하기엔 체력이 지나치게 낭비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작가는 본인의 청결 기준을 자신의 품으로 충족시켰다. 작가는 그것을 현지인에게 떠넘길 게 아니라 자신이 부담해야 할 몫이라고 여겼다.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살아보기 - 한껏 게으르게, 온전히 쉬고 싶은 이들을 위한 체류 여행

김남희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15


#여행 #관광 #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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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해지고 싶으면서도 다른 사람과 달라지는 것에 겁을 먹는 이중 심리 때문에 매일 시름 겨운 거사(居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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