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김제시 오정동의 한 고추밭에서 농민이 고추를 수확하고 있다. 2021.9.13
연합뉴스
벼농사 추곡수매로 돈을 벌고, 고사리 꺾어 돈을 벌고, 고추로 돈을 벌고, 잡곡 팔아 돈을 벌었다. 소를 키워 해마다 여섯 마리 송아지를 얻었다. 도시 사는 시누이 시동생들 김장김치 담가 돈을 벌었다. 트랙터로 이웃들 밭갈이 해 돈을 벌었다. 올해 들어 노인일자리에 나가 돈을 벌었다. 곶감도 깎고, 옻순도 따고, 호두도 팔았다. 시끄러비아지매 총수입은 이와 같았다. 정확한 금액은 알 수 없지만 칠팔천만 원은 될 거였다.
"내가 너그 집 살림살이 다 안다."
엊그제 호박죽을 쑤어 함께 먹는데 시끄러비아지매가 실눈을 뜨며 나와 아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뭘 알아. 우리 사는 게 이런데 무슨 살림살이랄 게 있다고."
"보소. 보소. 말하는 것 좀 보소. 내 눈은 못 속인다. 올해 우리 동네서 너그 집이 최고로 돈 많이 벌었을 걸?"
"뭔 돈을 얼마나 벌었다고 그래. 나 참."
"논 샀지. 관리기 장만했지. 지붕공사 했지. 그 돈 다 어디서 났어."
"논은 대출받았고, 관리기와 지붕공사 그게 얼마나 된다고. 자기 집에 비하면 우리 집이야 새발에 피지."
고사리 끊어 삼사백은 했지, 양파 감자 농사로 사오백은 했지, 고추농사 지어 삼백은 했지, 고구마 농사로 오백은 했지, 들깨랑 이런저런 농사로 또 좀 했지, 동생네 사돈네 여기저기 김장김치 보내고 꽤나 받았지, 거기에 민박손님 받은 거는 얼마나 되냐며 손가락을 꼽는 시끄러비아지매였다.
시끄러비아지매는 그야말로 동네 회계사였다. 글자도 잘 모르는데 셈은 누구보다 빨랐다. 뒷집 예삐엄마네 살림살이 셈도 훤했다. 벌 키워서 천만 원 넘게 했지, 고추 따서 몇 백만 원은 했지, 김장김치 담가주고 일이백은 넘게 받았을 거라며 눈빛을 반짝였다. 예삐엄마가 배꼽을 잡으며 뒤로 나자빠질 정도로 정확한 셈이었다. 호박죽 양푼을 앞에 두고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올해 꽤 많이 벌긴 벌었다. 농사지어 얻은 벌이를 연봉으로 따지면 이천만 원은 넘을 거였다. 민박에 기댄 아내도 제법 될 거였다. 물론 농사 밑천 따지면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겠지만 결코 적은 벌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올해부턴 아내도 적은 금액이나마 국민연금을 받고 있으니 기초생활비는 탄탄해졌다.
15년 전 내가 이곳 산골로 들어오기 직전에 받은 환경단체 상근활동비는 월 120만 원이었다. 아내의 벌이도 내 수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축은 고사하고 근근이 먹고 살 정도였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 벌이는 호강인 셈이다. 봄에 논 사면서 대출받은 2천만 원의 빚만 갚으면 크게 걱정거리가 없는 살림살이다.
도시에 살았더라면
가끔 이 산골에 들어온 것을 참 잘한 결정이었다고 여기며 산다. 그러면서 도시에 살았더라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상상해 보기도 한다. 음식 공부를 해온 아내는 필경 조그만 식당을 운영했을 것이고, 나는 아내의 식당에서 일을 거들거나 이런저런 연줄로 건물 경비 노동자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시민운동 환경운동의 원로가 되어 이런저런 일에 기웃거리기도 하겠지.
대다수 젊은이들이 그렇듯 아들은 아들대로 세상 어딘가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았을 거고, 최저임금 수준의 비정규직 일자리에서 청춘을 보냈겠지. 나이 마흔 살에 결혼은 언감생심, 나와 아내는 속만 태우고 있었겠지.
제대로 된 집도 한 채 가지지 못하고 아직도 전셋집을 전전하며 살겠지. 도시에서 살아갈 밑천도 기술도 없었고, 험한 세상 살아갈 가방끈도 짧고 집안도 보잘것없으니 차상위계층으로 노년을 맞이하겠지.
이 산골에 들어와서야 살만한 집도 한 채 가졌다. 좋은 며느리도 들었고, 귀여운 손녀도 매일매일 곁에 두고 있으니 이런 복된 삶이 있겠는가. 힘들어도 재미난 농사일을 하고, 민박 손님으로 든 낯선 사람들과 즐겁게 만나는 흔치 않은 삶을 산다.
살아보면 살만 한데도 농촌은 나날이 빈집이 늘어간다. 올해 우리 마을로 귀농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홀로 살던 할머니가 죽고, 홀로 살던 노인네가 요양원으로 떠나 오히려 두세 집이 비었다.
내 기준으로 치면 행복한 삶인데 다들 그리 여기지 않는다. 농촌에서 농사짓는 일은 아무나 하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여긴다. 농사지어봐야 판로도 막막하고, 제값도 못 받는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해마다 처참한 농촌 모습을 봐왔기 때문이다. 양파밭을 갈아엎고, 배추밭을 갈아엎고, 벼이삭을 갈아엎어버리는 농부를 봐왔기 때문이다. 조류인플루엔자로 생매장하는 닭을 봤고,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생매장하는 돼지를 봐왔기 때문이다. 물에 잠긴 수박과 폭풍에 떨어져 나뒹구는 사과를 봐왔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잃고 허망하게 주저앉은 농부를 봐왔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언젠가부터 농촌을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낙인찍어버렸다. 농산물은 이미 멸시받고 천대받는 것으로 사실화 되어버렸다. 농촌에서 뼈 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먹고 살 수 없다는 등식을 만들어 버렸다. '하루를 벌어먹고 살아도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라는 말이 격언처럼 박힌 세상에서 누가 쉬 농촌 살림을 선택하겠는가.
'국민총행복과 농산어촌 개벽대행진'이라는 깃발을 들고 한 무리 선지자들이 세상을 돌고 있다. '국민의 행복과 나라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3농(농어민·농어업·농어촌) 문제를 해결하고자 민초의 지혜와 열망을 한 데 모으는 대장정'이라고 한다.
행진단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농촌', '먹을거리 위기에 대응하는 농촌', '지역위기에 대응하는 농촌'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농촌 주민의 행복권 보장', '공익적 직접지불 확대', '먹을거리 기본법 제정', '농촌 주민수당 지급', '농촌 주민자치 실현'을 주장했다.
좋은 말이다. 농촌문제 해결에 단초가 될 '농지개혁'이 빠진 것과 '농촌 주민'이라는 용어가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좋은 주장이다. 이리 떠밀리고 저리 내쳐져 너덜너덜해진 농촌을 위해 이렇게라도 주장해주니 그것만으로도 눈물 나게 고마운 일이다.
'공익적 직접지불을 확대'하고 '농촌 주민수당'을 챙겨주면 좋기는 하겠다. 읍내 장날도 모르고 살면서 노인일자리라고 나가고, 기초노령연금마저 푼푼이 모아 도시 사는 아들딸 살림에 보태는 노인네들이 지천이다. 그들은 당신 스스로 따뜻한 고깃국 한 그릇 끓여 먹지 못한다.
그러나 '행복권'이 무슨 복권과 같은 것은 아니다. 평생을 농사일에 파묻혀 살아온 농산어촌 노인네들 아침저녁 밥상을 돌봐주는 일에서 행복권은 시작되어야 한다. 주민수당이나 공익적 직접지불로 통장에 돈을 꽂아주는 일은 행복과는 좀 먼 거리다. '국민총행복' 이라는 용어가 '장님 코끼리 등 더듬는 듯' 느껴지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