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5월 제주농업학교에 설치된 미59군정중대 본부4.3 당시 제주농업학교는 도내의 인재들의 몰려들어 수학에 정진했던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4.3이 발발하면서 이곳에는 제9연대를 시작으로 11연대(48년 5월), 2연대(48년 12월), 독립제1부대(49년 7월) 등의 사령부가 줄줄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군 토벌대가 이 곳에 주둔하면서 도내의 내노라하는 유지들과 지식인, 그리고 입산 자수자와 체포자 등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잡혀와 고문과 취조를 당한 후 처형되거나 육지형무소로 끌려갔던 한과 눈물의 장소이기도 했다.
제주 4.3아카이브
5.10 단독 선거를 피해 산으로 며칠 동안 피신갔다가 내려오고 나서 봄과 여름 두 계절이 지났다. 아마 늦가을이나 초겨울 즈음 어느 날이었는데 몇 월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린 나의 느낌에도 마을 분위기가 좀 어수선했지만 나는 친구들과 놀이하랴 집안일을 도우랴 나로서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른들의 세계가 어찌 돌아가든 나는 아침이면 학교에 갔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일을 돕고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워낙 몸이 약하신 어머니는 누워 있는 일이 많았기에 우리 집의 맏이인 언니가 엄마 역할을 대신했다. 그리고 나는 늘 동동거리는 언니를 도와 집안일을 같이 했다.
1948년 10월11일에는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김상겸 대령, 부사령관송요찬소령)가 설치되어 대대적인 군경합동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제9연대장 송요찬이 10월17일에 내린 포고령에 따라 제주도 중산간지대 민간인들에 대한 소개령이 내려지고 대대적인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작전의 대상에는 무장대뿐만 아니라 마을에 거주하는 일반 주민도 포함되었다. 더욱이1948년 11월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는데, 계엄령이 해제된 12월31일까지 제9연대는 "모든 저항을 없애기 위해 모든 중산간마을주민들이 유격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 (출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 2003)
학교 운동장 밖에 박수소리... 꽁꽁 묶여 있던 외할머니
그날도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에 학교로 갔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창 밖으로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에 교실에서 수업을 듣던 아이들이 우르르 창가로 몰려갔다. 운동장은 어느새 마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대부분 여자 삼촌들이었고 핏기 없는 하얀 얼굴로 잔뜩 긴장하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들 주변에는 총과 몽둥이를 들고 있는 젊은 남자들이 사람들을 위협하는 자세로 무섭게 서 있었다. 군인 옷을 입은 사람들도 있고 그냥 옷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서슬에 겁을 먹은 여자 삼촌들이 억지로 박수를 치고 있었고 일제히 한 방향을 보고 있었다.
나도 사람들이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따라갔다. 그들 앞에 서 있는 이는 바로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의 두 손은 뒤로 꽁꽁 묶여 있었고 당시 그 표정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다. 외할머니의 두 눈에 드리워진 심정이 무엇이었을까? 나는 지금까지도 외할머니의 표정을 외면하고 싶다.
사람들의 박수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들 주변으로 몽둥이와 총을 들고 서 있는 남자들이 박수소리를 높이라고 협박하고 있었다, 박수소리와 함께 '탕' 하는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외할머니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솟기 시작했고, 어느새 붉게 물든 할머니의 몸뚱이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할머니의 몸은 피범벅되며 쓰러졌지만 박수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운동장을 둘러싸고 서 있는 약하디 약한 사람들은 같은 동네에서 정을 나눴던 이의 죽음 앞에서 차가운 총구의 위협을 감당 못하고 억지로 억지로 박수를 끌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