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 놀이터에서 공을 기다리는 개들
박은지
비반려인과의 공존을 위해서
나는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 집순이 성향에 가깝다. 그래도 반려견 여름이의 산책을 위해 귀찮지만 몸을 일으켜서 목줄을 집어들면, 여름이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벌떡 일어나서 잽싸게 목줄에 얼굴을 밀어넣는다.
집순이, 집돌이라고 할 수 있는 개들이 있을까? 적어도 내가 아는 개들 중에는 없는 것 같다. 개는 집에만 있을 수 없는 동물이다. 바깥에 나가서 바람과 잔디 냄새를 맡고, 또 다른 개들이 남긴 흔적을 더듬으면서 나름대로의 사회생활을 해야 행복을 느끼는 생명체다. 오래전부터 인류가 개를 우리의 삶에 편입시킨 이상, 인간이 만든 도시에도 개를 위한 자리를 내어주면 좋겠다.
강아지의 목줄을 풀고 뛰어놀게 할 수 있는 공간을 아쉬워하는 이유는, 평소에는 당연히 목줄을 채우고 사람의 속도에 맞춰 산책한다는 규칙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비반려인이 동물을 위한 공간을 배려해주듯 반려인도 피해를 주지 않도록 의무를 다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많은 반려동물의 삶도 조금 더 풍요로워질 수 있는 새로운 규칙들을 만들어갈 수는 없을까 바라게 된다. 개개인의 양심과 눈치와 양보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교육과 변화가 이루어지며 반려견이 자연스러운 사회의 일부로 스며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반려견을 위한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면 흔히 듣는 얘기가 '그럴 거면 너희 집 마당에서 키우거나, 마당이 없으면 개 키우지 마라'는 것이다. 물론 반려인들이 개별적으로 모두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산다면 좋겠지만, 우리나라 집값과 현실을 고려할 때 그런 특정한 조건을 갖춰야 동물을 키울 수 있다는 건 어려운 이야기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존을 위해 깊이 고민하기보다 보기 싫은 것을 보이지 않는 자리로 치우는 방향으로 간단히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다수의 권력에 기반한 배제와 격리는 언젠가 반드시 자신을 향할 수 있다.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