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 올디스의 팥빙수. 빙수에 단팥만 올렸다.
조경국
겨울에 먹는 팥빙수는 가슴 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별미 중 별미. 진정 팥빙수를 즐기는 마니아라면 겨울 빙수를 즐길 줄 알아야... 어쨌거나 이렇게 팥빙수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 몸에 열이 많은 탓도 있는 듯하다.
그런데 빙수 마니아는 시대를 초월해서 존재했던 듯. 소파 방정환 선생은 '빙수당'이라 불릴 정도로 빙수 마니아였고, '빙수'라는 짧은 수필도 남겼다. 거기에 이런 글이 나온다. 일제강점기 빙수는 단팥이 아닌 딸깃물을 뿌려준 모양이다.
경성 안에서 조선 사람의 빙숫집치고 제일 잘 갈아주는 집은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종로 광충교 옆에 있는 환대상점이라는 조그만 빙수 점이다. 얼음을 곱게 갈고 딸깃물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도 분명히 이 집이 제일이다. 안국동 네거리 문신당 서점 위층에 있는 집도 딸깃물을 아끼지 않지만, 그 집은 얼음이 곱게 갈리지 않는다. 별궁 모퉁이의 백진당 위층도 좌석이 깨끗하긴 하나 얼음이 곱기로는 이집을 따르지 못한다.
이 글을 읽으며 무릎을 쳤다. 서점 위층에 빙수집이라니. 헌책방을 하고 있는 터라 만약 위층이든 아래층이든 빙수집이 있다면 책방보다 빙수집에서 노닥거리는 시간이 많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서점과 빙수집, 상상만 해도 완벽한 조합이다. '경성 제일'이라는 환대상점의 빙수 맛이 너무나 궁금하지만, 책방에서 걸어서 1분 거리에 맛있는 팥빙수집이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2018년엔 100빙... 지난해엔 60빙
팥빙수는 주로 여름에 먹는 계절 음식이긴 하나 사계절 가릴 것 없이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빙수를 대표 메뉴로 내세워 프랜차이즈로 성공한 모회사의 마케팅 영향이 크지 않나 싶다. 2013년 처음 문을 열었던 그 회사가 1년 만에 전국에 500개 가까운 분점을 열었고, 내가 사는 지역에도 가게가 문을 연 덕분에 겨울에도 편히 팥빙수를 먹을 수 있었으나 내 입맛엔 이곳 팥빙수는 너무 달고 비쌌다.
팥빙수가 단 것은 당연하다 하겠지만, 단맛도 그 종류가 여러 가지다. 금방 질리는 단맛이 있는가 하면, 고소한 단맛도 있고, 부드러운 단맛도 있고, 은은한 단맛도 있다. 아이스크림과 온갖 고명(?)이 올라간 달기만한 팥빙수는 성에 차지 않았다. 오로지 팥과 빙수(우유든 물이든) 딱 두 가지만 그릇에 담긴 '순수한 팥빙수'가 먹고 싶었다.
팥알과 고소한 맛이 살아 있어야만 '완성형 팥빙수'라 할 수 있다. 팥빙수도 여러 형태가 있지만 팥과 얼음으로만 만든 순수한 팥빙수를 가장 좋아한다. 요즘은 물 얼음을 사용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예전엔 분식점에서 먹던 팥빙수는 얼음집에서 가져온 얼음을 그대로 갈아 팥을 올려내는 팥빙수가 전부였다(진주 수복빵집에 가면 옛 방식으로 만든 팥빙수를 맛볼 수 있다).
이 조건에 맞는 곳을 찾았으니 바로 '올디스'였다. 벌레 먹고 못난 팥알을 일일이 골라내는 걸 보고 "이 집은 팥에 진심이구나" 했다. 카페였으나 커피보다 팥빙수가 더 유명한 탓은 그만한 정성으로 단팥을 준비하는 게 이미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팥빙수에 올릴 팥을 제대로 삶는 것은 쉽지 않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기도 하고 한결 같은 맛을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래는 2015년 8월 7일 올디스 팥빙수를 처음 맛보았던 날 남긴 기록이다. 지금까지 7년째 단골로 다니고 있는 셈인데 가격(5000원)도 맛도 한결같다.
팥빙수를 사랑한다. 찹쌀떡, 콩고물, 젤리, 연유 등등 고명을 올린 것도 좋아하지만 역시 팥빙수는 팥과 얼음만으로 먼저 승부를 걸어야 한다. 알이 실한 국산팥을 집에서 고아내는 가게라면 그걸로 족하다. 기본이 갖춰지면 나머지는 장식. 인식씨와 함께 코멘샤에서 냉라멘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올디스(평거동)에서 팥빙수를 먹었다. 오랜만에 기본에 충실한 팥빙수를 만났다. 파슬파슬한 통팥과 곱게 갈린 얼음과 고소한 우유가 완벽하게 조화롭다. 나름 팥빙수 마니아라고 자부했는데, 올디스를 몰랐다니... 가격은 5천 원. 인식씨는 수염 난 시커먼 동네 아저씨랑 점심에다 팥빙수까지 같이 먹는 '슬픈 현실'에 대해 푸념했으나, 나는 무시하고 팥빙수가 맛있다는 생각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