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지부 외 7개 시민단체는 작년 9월 KBS를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고용노동부에 고발했다.
김기영
2019년 제작사들은 스태프들과 서면 근로계약서를 체결하라는 고용노동부의 시정요구를 사실상 무시했다. 법은 있는데, 방송 제작 현장은 무법지대처럼 보인다. 그 배경에는 불안정한 노동과 다단계 하도급 구조가 있다.
계약직 노동자가 스스로 사용자를 상대로 노동조건 개선, 위법행위 신고를 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목소리 냈을 때 계약 갱신 여부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규직 일자리가 아닌 계약직 비정규직 일자리는 본질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다.
어떤 제작사나 방송사에 고정적으로 고용된 것이 아닌 프리랜서 방송 제작 스태프들은 재취업의 문제를 하나의 방송 프로그램이 완성될 때마다 마주하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은 불안정한 노동은 계약 연장을 인질삼아 노동자의 침묵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법은 존재하되 법이 작동하지 않는 현실을 만든다.
방송 제작 현장은 다단계 하도급이 만연하다. 방송사에서 대형 제작사로, 대형 제작사에서 다시 또 소규모 제작사로, 소규모 제작사에서 다시 팀장급 스태프로의 다단계 하도급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촬영 스케줄을 정하거나 수정할 권한이 없는 팀장급 스태프는 방송 제작 스태프의 근로시간을 줄여줄 수 있기는커녕, 마찬가지의 과로 노동에 시달린다.
현장을 통솔할 권한이 없고 영세한 서류상의 사용자들인 소규모 제작사와 팀장급 스태프들은 제작 스태프들의 노동환경을 개선할 권한도 여력도 없다. 대형 제작사와 방송사는 서류상의 책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소형 제작사와 팀장급 스태프는 여력이 안 된다는 이유로, 방송 제작 현장의 노동환경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
결국 다단계 하도급 그리고 불안정한 노동이 드러내는 현행 법제도의 한계가 방송 제작 현장에도 나타난다.
지속 가능한 K드라마를 위하여
곧 있으면 설이다. 방송사에서 각종 특집 프로그램들을 편성할 것이다. 올해 2월에 있을 베이징 동계올림픽, 11월에 있을 카타르 월드컵, 9월에 있을 아시안게임에 발맞춰 중계방송도 각 편성될 것이다. 방송 스태프들은, 특집프로그램, 중계방송이 기존에 제작하던 방송을 대체하게 된 경우 그 기간 동안 수입이 없어진다. 방송 스태프 중 일부는 임금절벽을 견디지 못해 방송계를 떠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K드라마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개인을 갈아 넣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업계에서 개인이 버틸 수 있는 기간은 한정되어 있다. 한국 방송 산업이 지속가능하려면, 그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건강해야 한다.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사람에게 창의성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또한 한국 방송 산업이 만들어내는 일자리들이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안정적인 양질의 일자리여야 한다.
K콘텐츠 지원, 육성 공약에는 K콘텐츠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책이 포함되어야 한다. 프로그램이 결방될 경우를 대비하여 임금을 보전하는 정책, 콘텐츠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결정할 때 모범적인 노동환경을 마련할 것을 강제하는 정책, 고용노동부의 근로감독 기능을 강화하는 정책 등이 있을 것이다. 또한 노동 관련법들의 여러 허점들을 보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임을 입증할 책임은 근로자가 아닌 사용자에게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방송 제작 현장의 표준근로계약서 도입과 확산이 시급하다. 방송 스태프들의 노동조합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는 드라마제작현장의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을 위해 2019년부터 지상파 3사와 전국언론노동조합 그리고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와 4자협의체를 진행했었다.
그러나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의 표준근로계약서 체결 거부와 MBC와 SBS의 협의과정에서의 이탈로 현재 4자협의체의 대화는 중단됐다. 스태프 개인이 방송 제작 현장을 바꾸기에는 운동장은 너무도 기울어져 있다. 근로계약서 체결이 개인의 용기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모두가 하는 당연한 것이 될 수 있도록 노사 대화를 이끌어줄 정부가 필요하다.
또한 방송통신위원회, 문화체육관광부, 고용노동부 등 방송 제작 현장은 소관부처가 많아, 실질적인 방송 제작 현장 개선 업무는 그 사이에서 자주 길을 잃는다. 대화를 이끌어주고 방송 제작 현장 개선 업무를 담당할 하나의 책임부처가 필요하다.
카메라 뒤가 화면만큼 빛날 수 있게, K드라마 산업이 강자독식의 차가운 세계로 남지 않게, K드라마의 성공만큼이나 K드라마를 가능하게 하는 제작 현장의 스태프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할 대선후보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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