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휘 선생 위패를 가리키는 이승택 (사)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부회장
김경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성재 이동휘
1873년 6월 20일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단천군수의 심부름을 도맡는 통인(通引)으로 있을 당시 기생을 추행하는 군수를 보고 화로를 끼얹었을 정도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이후 대한제국 군대에 투신한 선생은 고종의 신임을 얻었을 정도로 강직하고 충성심이 남달랐다. 1903년 5월 강화도 진위대 대장으로 부임한 선생은 진위대장직을 사임한 후에도 강화도에 머물면서 기독교 선교활동과 교육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경술국치 후 해외로 망명한 선생은 북간도 각지를 순회하며 교육운동·선교운동에 종사하다 다시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고 북간도 왕청현 나자구에 사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전쟁을 추진했다.
1917년 선생은 사상의 전환을 가져오게 된 일대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러시아 혁명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의 거대한 물결을 목도한 선생은 러시아 볼셰비키와의 연대를 통한 항일투쟁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1918년 하바롭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유동열·김립·오성묵·오와실리·이인섭 등과 함께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
1919년 9월 11일 서울의 한성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통합하여 상해에서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자 선생은 통합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그러나 외교독립론을 고수하며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위임통치 청원서'를 제출한 임시대통령 이승만과 갈등을 빚은 끝에 1921년 임시정부를 탈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