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관람 후 전태일 모친 이소선 여사와 함께사회적 약자와 가까이하고 사랑을 몸소 실천한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
김수환 추모 홈페이지
한국천주교는 전래과정에서 혹독한 탄압을 받고 수많은 순교자를 내는 등 수난을 겪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외국인 주교들의 친일성향과 3ㆍ1혁명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 그리고 이승만 정권기 일부 주교 등의 일탈된 행위로 인해 국민의 시선이 곱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고, 내부에서도 지나친 보수화에 반발이 따랐다.
그러던 천주교가 김수환 추기경의 등장과 함께 대사회 발언이 시작되고 특히 박정희가 3선개헌을 강행, 영구집권의 야심을 보이면서 본격적인 대정부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 1969년 김수환 추기경이 명동성당에서 크리스마스 메시지(평화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예언자적 비평의 입장에서 발표(발표 도중 갑자기 TV중계가 중단되었다).
▲ 1968년 강화도 신도직물의 노사분규에 따른 가톨릭노동청년회의 역할 증대 및 뒤이어 한국모방, 전태일 분신자살사건, 김진수 드라이버피살사건 등의 노동문제에 대한 가톨릭교회 발언의 에스컬레이터.
▲1969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추기경이 밝힌, 공명선거 분위기를 위해선 양심에 따른 사제들의 참관 허용도 가능하다는 발언.
▲1972년 7ㆍ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뒤에 김추기경이 언급한 <총화를 위한 비상사태 선언과 보위법과 정보정치의 철회> 등 5개항 대정부 자세 표명.
▲1973년 12월 16일 YMCA 강당에서 인권주간에 즈음한 김추기경의 헌법문제에 대한 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