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기지로 귀순한 이웅평 대위의 모습
대한민국공군역사화보집
1983년 2월 25일 오전 10시 58분, 서울 등 수도권에 갑자기 대공 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여기는 민방위본부입니다. 지금 서울, 인천, 경기도 지역에 경계경보를 발령합니다. 국민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북한기들이 인천을 폭격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다급한 민방위 관계자의 목소리에 당황한 시민들은 전쟁의 악몽을 떠올리며 생필품 사재기에 들어갔고 일선 군부대에서도 무장을 갖추는 소동이 있었다. 정오를 넘기면서 거리에는 사건 진상을 알리는 호외가 뿌려졌다.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울린 실제 경보는 경악 그 자체였다.
불가능에 가까웠던 '탈북' 스토리
이날 오전 평안남도 개천비행장을 이륙한 북한 국적의 미그MIG-19기 1대가 편대를 이탈해 기수를 남으로 돌렸다. 고도를 낮춘 채 시속 920㎞의 최고 속도로 연평도 상공의 북방한계선을 넘자 우리 공군은 즉시 초계 비행중이던 F5 전투기 4대가 요격에 나섰다. 북한의 선제공격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연평도 상공에서 맞닥뜨린 일촉즉발의 상황은 미그기가 양 날개를 흔들며 귀순 의사를 보이면서 일단락됐다.
사건의 주인공은 북한 조선인민군 공군 조종사 이웅평 상위(대위)였다. 김책공군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비행사였던 그가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동해안에 떠내려 온 삼양라면 봉지의 '파손, 불량품은 교환해 드립니다'는 문구에 충격을 받고 남하했다지만 그보다는 북한 최고 존엄 김일성 사진을 실수로 훼손한 후 귀순을 결심했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다.
그의 탈북 스토리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당시 북한은 무조건 최소 2대, 보통은 4대 이상의 전투기가 비행을 하는 '편대 비행'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날은 2대의 비행기가 작전을 수행하게 됐고, 마침 후발대 비행기였던 이웅평은 선발대 비행기의 눈을 피해 몰래 경로를 이탈할 수 있었다.
그는 북한의 지상 레이더에 걸리지 않기 위해 초저고도 비행을 했다고 밝혀 놀라움을 줬다. 당시 이웅평이 몰고 온 MIG-19는 레이더 장비가 없어 전파를 따라가거나 계기판 혹은 육안 비행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웅평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레이더를 피할 수 있는 높이 불과 50m 초저고도 비행을 유지, 오직 계기판에 의존해 내륙 비행을 시도했다. 결국 탈북에 성공한 그가 우리나라 군인에게 경계 속 처음으로 건넨 말은 "나 할 말 많다. 혹시나 따라왔을지 모르는 북한군에게 총 맞지 않게 해 달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