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살인> 인혁당 사형집행 소식에 가족들이 오열하는 모습(1975. 4. 9)제2차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공작으로 조작된 공안사건이다. 민주화운동가들을 잔혹하게 고문하고 대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내린 지 18시간 만에 전원 처형하였다.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는 1975년 4월 9일!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 항의했고 국제앰네스티도 4월 10일에 박정희 정권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박정희 정권의 잔혹함과 야만성을 드러낸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경향신문사
사제단이 인혁당 사건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사연을 들어보자.(함세웅 신부 증언)
저희들은 전국 각지에서 거의 한 주일에 한두 번 돌아가면서 미사를 봉헌하려고 노력했다. 시국에 대해 반성도 하고 비판도 가했다. 그래서 우선 민청학련 관련 학생들의 부모님들이 억울한 내용, 재판 과정에서 들으신 것들, 조사 과정에서 고문당한 내용, 사건 발표 내용 자체가 사실과 너무나 다른 점들을 호소하시면서 우리가 많이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한 달 정도 지나갔을 때, 다른 가족들이 찾아오셨다. 그분들은 이른바 인혁당 관계 가족들이셨는데, 저희들도 이름 자체가 조금 그러니까 상당히 조심스럽게 만나봤다. '인민혁명'이라고 해서 그중 한 어머니 말씀이 이랬다.
"신부님, 우리 남편은 군복무를 했고 육군 대위로 제대했고, 또 우리나라를 위해 북한과 대치된 상황에서 국방의무를 다한 군인이었는데, 지금은 기업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만약 내 남편의 사상이 의심이 간다든지 북한과 연계되어 있다면 저 자신도 이의를 달지 않겠다. 그러나 꼭 조건이 있다. 꼭 공개재판을 통해 밝혀졌으면 한다."
미사 전에 그분들을 만나 뵈었더니 그분들의 호소가 너무 절실하고도 간곡할 뿐 아니라 진실에 기초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공개재판을 통해서 사형이 집행된다면 이의를 달지 않겠다고 자신있게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들을 때 우리가 들어줘야겠다. 1차적으로 유신체제였지만 정부당국과 중앙정보부에 대해 요구했던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개재판은 필수적 과정이니까 공개재판의 절차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주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