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고등보통학교(1930)현 경복고등학교 전신인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의 1930년 모습이다.
서울역사박물관
반면 일본은 보통학교 6년, 고등보통학교 5년, 대학 진학을 예비하는 구제(舊制)고등학교 3년, 제국대학 4년 학제였다. 그마저 최상위 학교인 전문학교는 1916년에서야 법학, 의학, 공업의 3개가 설립될 지경이다. 보통학교 교육이 불충분한데, 상급학교 개설은 과분하다는 핑계였다.
들불처럼 번진 3.1운동이 문화통치를 끌어낸 명분상 변화의 계기였으나, 이는 고도화한 또 다른 통제였다. 교육령 부분 개정(1920)과 '2차 조선교육령(1922.02)'으로 대학 설립이 가능한 법적 장치가 마련되자, 동아일보가 '민립대학의 필요를 제창하노라'라는 사설(1922.02.03)로 불씨를 뿌린다. 일제가 주도하는 '관립대학' 설립을 예측하면서, 민족 교육을 위한 '민립대학'으로 맞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교육 운동 단체인 조선교육회(1920)가 교육령 개정에 맞춰 발기인 47인으로 '조선민립대학 기성준비회(1922.11)'를 발족시킨다. 이듬해 3월 발기인을 1,170명으로 늘리고 462명이 참여한 총회를 개최한다.
모든 비용은 모금으로 충당키로 결의하며, 1단계(4백만원)로 법과, 문과, 경제과, 이과와 예과를 2단계(3백만원)로 공과를 3단계(3백만원)로 의과와 농과를 설치한다는 계획이다. 이 조직이 '조선교육협회(1923.06)'로 인가받아 합법적 활동을 보장받는다. 국내는 물론 재외 동포의 호응도 뜨겁다. 그러나 1923∼1924년 홍수와 간토 대지진에 따른 경제공황으로 기세가 한풀 꺾이고 만다.
관립대학 설립
일제의 교육목표는 '국가주의 완성'이다. 따라서 조선에 민립대학이 설립된다면, 이의 통제가 어려워진다고 예상한다. 관립대학 설치로 이를 제어하며, 일제가 의도한 국가주의 교육을 주입할 생각을 노골적으로 내보인다. 총독부가 설립 추진한 대학은 '제국대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