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마을 앞 건너편에 개구리 닮은 섬 '와도'가 보인다.
오문수
사도진이 위치한 영남면 금사리는 여자만으로 진입하는 외적을 쉽게 방어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여자만은 고흥반도와 여수반도 사이의 내해로 고흥과 여수를 관할하는 전라좌수영의 중앙에 있는 수로이다.
사도진은 성종 7년 이전부터 설치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사도진이 전라좌수영의 유일한 첨사진이었지만 중종 때 개편되어 방답진이 첨사진으로 설치되면서 좌수영 관할 내 2개의 첨사진이 운영되었다. 하지만 좌수영 관할 내 모든 만호진이 사도진에 편입되어 있어 전라좌수영 다음으로 중요한 수군진이었다.
이순신 장군과 사도진에 얽힌 사연도 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2년 2월 25일 전투준비태세 점검차 사도진을 초도순시 차 기록한 <난중일기>에는 전투준비에 소홀한 사도진 군사들을 징계한 내용이 나온다.
"여러 가지 전쟁 방비의 결함이 많으므로 군관과 색리들에게 벌을 주고 첨사를 붙잡아 들였으며, 교수(수령 밑에 있는 벼슬아치)는 내어보냈다. 다섯 포구 중에서 방비가 제일 잘못되었는데 도순찰사가 표창하는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죄상을 조사하지도 못하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역풍이 거세게 불어 배가 떠날 수 없어서 머물러 잤다"
사도진은 첨사진의 위상에 걸맞게 대맹선 1척, 중맹선 4척, 소맹선 2척, 무군소맹선 8척을 보유했다. 이후 전선으로 교체되어 전선 2척, 병선 2척, 사후선 4척을 폐진시까지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