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H가 개발 중인 파주 운정신도시
서상일
소리만 요란했던 한국토지주택공사(LH) 비리 수사. 지난 21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최종 발표를 했다. 특별수사본부까지 꾸려서 진행했지만, 결국 미진한 결과를 내놓았다.
남구준 국가수사본부장은 "공직자는 은밀하고 조직적으로 불법을 했기 때문에 적발이 쉽지 않았다"고 밝혔다. 내부 정보를 이용한 공직자의 투기 비리를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과연 앞으로 관리 감독을 잘한다고 부패와 비리가 없어질 수 있을까? 이 사태의 진짜 문제는 비대한 조직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비리'라는 점이다. 자신이 개발 사업의 판을 깔고 자신이 개발 사업자가 되니, 구조적으로 비리가 생길 수밖에 없지 않겠나!
앞으로도 또 생길 수밖에 없다는 우려를 그치지 않을 수 없다. LH 직원들의 태도에서도 그러한 점을 내다볼 수 있다. "어차피 한두 달 지나면 다 잊혀진다." "니들이 열폭해도 난 차명 투기하고 정년까지 꿀 빨고 다닐 거다." "꼬우면 이직하든가."(LH 직원 망언 릴레이, JTBC, 2021년 3월 10일)
국민의 지탄을 받는데도, LH 직원들은 이런 자세였다. 계속해서 자신들이 또 판을 깔고 자신들이 또 개발 사업자가 되어 땅장사와 돈놀이를 하게 될 테니 아무 걱정 없는 것이다.
부패의 상징이 된 LH
우리가 제대로 따져야 할 것은 국민의 공분을 사는 LH의 부패 문제만이 아니다. LH가 헬조선의 설계자 중 하나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LH는 토지를 개발하고, 도시를 계획하고 정비하며, 주택을 건설하고 공급하는 등의 일을 하는 공기업이다. 즉 신도시 개발, 재개발, 역세권 개발, 혁신도시, 기업도시, 행정중심복합도시, 보금자리주택, 행복주택 등을 관장하는 '거대 공룡 기업'이다.
한 도시에서의 삶의 방식과 삶의 질은 도시 설계와 도시 계획에서 이미 많은 부분이 결정된다. 즉 어떤 도시에서 사느냐에 따라 어떤 라이프스타일을 지닐지, 어떤 삶의 질을 누리게 될지 많은 부분 정해진다. 그런데 LH가 그동안 해왔던 일이란 '자동차 중심의 대단지 아파트 조성'이 기본 줄기였다. 이건 주민 화합과 공동체 조성과는 거리가 먼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도시 설계다.
일단, 거주 지역에서 소득 수준별로 시민들을 분리시킨다. 그리고 자동차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걸어 다니면서 사람을 마주치고 거리에서 이웃과 만나 이야기 나눌 일도 없다. 같은 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마주칠 기회가 없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당연히 주민이 화합할 리도 공동체가 형성될 수도 없다.
또한 자동차 중심의 대단지 아파트를 무더기로 조성하면, 도시에 정겨운 골목길이 사라지고 거대 블록만이 있어서, 소규모 민간자본이 밀려나고 거대 블록을 차지할 수 있는 대자본만이 남게 된다.
거주자들은 생활공간(보행생활권 내)에 상업 시설이 없으니, 차를 끌고 상업 지구로 이동해야 한다. 이러한 상업 지구에는 은행, 병원, 프랜차이즈, 입시 학원, 대형 마트만이 자리 잡을 수 있다. 즉 소규모 민간자본이나 골목 상권은 자리 잡거나 형성되기 어렵다.
도시가 이렇게 '게이티드 커뮤니티'의 '거대 블록'으로 각각 분리되어 사람과 사람이 마주칠 기회가 없다 보니, 자신과 다른 사람을 악마화하는 혐오와 갈등이 쉽사리 조장된다. 이른바 도시의 공공성과 포용성이 없는 것이다. 대신 사회적 약자가 밀려나고 대자본의 약탈이 진행된다. 당연히 이런 곳에서는 계층 간 이동 사다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바로 '헬조선'이다!
일찍이 이러한 도시 계획에 대해 도시 사상가 제인 제이콥스는 "도시가 서로 의심하고 적대하는 한 무더기의 구역으로 전환된다"고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166쪽).
제이콥스는 그런 의심과 적대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물리‧사회‧경제적 연속체"(172쪽)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자본만이 차지할 수 있는 거대 블록이 아니라 작은 블록으로 '소규모 민간자본의 지속적인 투자'가 가능해져야 한다는 점도 강조한다. 그때에야 활력 있는 도시, 성장하는 도시가 될 수 있고 비로소 사회 통합도 가능해진다.
'도시설계 시민위원회'는 어떨까?
또한, LH는 땅 짚고 헤엄치기로 '싸구려 복제품'(획일화된 대단지 아파트)을 전국에 직접 짓거나 그렇게 짓게 설계함으로서, 주거의 질을 형편없이 떨어뜨린 주범이기도 하다. 제인 제이콥스는 이를 "죽은 채로 태어났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마찬가지로 LH는 전국에 똑같은 복제품인 혁신도시를 만들었다. 획일화될수록 도시 성장의 동력이 사라지며, 자족의 기반 없이 서울에 기대어 살아야 한다. 다양성과 유동성이야말로 도시의 중요한 자산이자 도시 성장의 기본 요소다. 그러니까 각기 다르게 활력 있는 도시가 여럿 있어야 한다. 혁신도시는 그런 역할을 했어야 했다.
그런데 LH는 수도권에 신도시를 개발하고 전국에 혁신도시를 만들면서 자족 기능이 없는 싸구려 복제품만 계속 생산하고 있다. '죽은 채로 태어난' 도시다. 그러니 서울 의존성이 자꾸 커지게 되고 시간이 갈수록 헬조선의 상황이 심화된다.
안타깝게도, LH 개혁의 기회는 이미 날려 버린 듯하다. LH가 스스로 자정하고 개혁하기를 기대할 수도 없고, 대통령에게도 국회에도 기대할 바는 별로 없어 보인다. 수사 결과 일부 드러났듯이 LH 부패의 고리에 정치인이 함께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마침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있다. 이를 지렛대로 삼아, 지자체마다 일반 주민이 참여하는 '도시설계 시민위원회'의 신설을 요구하면 어떨까? 생활하는 주민의 입장에서 우리가 사는 도시의 설계와 계획을 검토하고 수정하며 다듬을 기회가 생긴다면 어떨까?
도시 계획 전문가도 아닌 일반 시민들이 어떻게 도시설계를 검토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UN의 '새로운 도시 의제'(New Urban Agenda, 2016년)를 바탕으로 시민들이 도시의 공공성, 도시의 포용성, 지역유산과 도시, 지속가능성 등을 따져보는 것도 괜찮은 방식이 될 수 있을 테다.
이러한 '도시설계 시민위원회'라면, 헬조선의 상황을 완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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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설계 시민위원회' 신설을 요구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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