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초극장중구 초동에 일본인이 세운 약초극장. 사진 우측 건물에 '약초영화극장개관'이라 쓰인 것으로 보아, 1930년 사진으로 추정된다.
서울역사박물관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서유럽에서 제작된 '무성영화'가 수입되어 이들 극장에서 상영된다. 이때 '변사'가 전성시대를 누린다. 요즘 연예인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기도 한다. 영화의 시대다.
일제 감시체계는 매체 발달과 그 궤를 같이했다. 신문지법(1907)과 출판법(1909)으로 신문과 잡지, 출판물의 사전검열과 정·폐간을 가능케 한 사례가 있었다. 영화도 다르지 않았다. 처음(1922)엔 서구 수입 영화에 치중하여 풍기문란이나 폭력 등에 검열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조선인 영화제작이 본격화하자 '흥행및흥행장취체규칙(1922)'을, 제작 편수가 많아지자 '활동사진검열규칙(1926)'으로 철저한 사전검열을 시행한다. 변사도 선발시험을 통한 자격제로 통제를 강화한다. 만주 침략 이후엔 '활동사진영화취체규칙(1934)'을 통해 일제 시책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상영을 금지하는 조치를 단행한다.
전쟁이 대륙과 동남아로 확장하자 섬나라 영화계는 '일본영화령(1939)'을 제정, 전시체제로 전환한다. 한반도에선 '조선영화법(1940)'으로 전쟁과 군국주의를 옹호하고 선전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이 법으로 9개 사가 참여한 '조선영화제작자협회' 결성을 강제, 영화제작에도 관여한다. 전쟁이 무르익자 기존 10개 영화사를 통폐합하여 '조선영화제작회사(1942)'를 설립, 영화제작을 사실상 국유화시킨다. 이 회사를 통해 전쟁에 협력하는 이른바 합작영화 제작을 강요했다.
제작뿐 아니라 배급사 통폐합으로 '조선영화배급사'를 설립한다. 이로써 제작·배급을 통제·장악하여 일제 시책에 부합하는 영상만을 만들어 영화를 군국주의 선전전용물로 전락시켜버린다.
변화와 실험
조선 영화 흥행의 시작을, 일본인이 제작하여 단성사에서 상영한 <춘향전>(1923)으로 본다. 이후 나운규의 <아리랑>(1926)'을 전환점으로 약 10여 년 조선인이 제작한 무성영화가 전성시대를 구가한다. 음향 기술 발달로 1935년을 전후, 발성영화가 서서히 안착을 시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