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들에게영화 <달콤한 인생>의 명대사
달콤한 인생
빌런이 없는 청정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도 미디어를 통해 선 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누군가의 외모를 깎아내리거나 약자를 희롱하며 웃음을 유도할 때가 많다. 아카데미에서 크리스 록이 제이다의 삭발을 농담 소재로 삼은 것처럼 말이다.
사실 지금껏 우리 사회는 누군가의 아픔과 콤플렉스를 웃음 소재로 삼으며 웃어왔다. 장애인을 흉내내거나, 외모를 비하하거나 누군가를 희생시킴으로써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나 인권의식 향상으로 사회적으로 불편함에 대한 인지감수성이 높아지면서 우리의 웃음이 무엇을 향했는지를 자각하게 되었다. 이제까지 많은 개그들이 누군가의 고충을 웃음의 소재로 삼았다는 것에 대한 반성이 나오고 착한 개그가 주목받게 된 배경이다.
무지가 폭력이 되지 않도록
선 넘는 모든 무례한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고 불쾌감을 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른다고 무례함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어떤 농담은 농담이 아니라 조롱이고 무례함이기 때문에 우리는 선을 넘는 기준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풍자와,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조롱을 구분했다. 풍자와 조롱, 둘은 자주 혼동되지만 '대상이 강자인가 약자인가' 그리고 '대상의 속성이 선택인가 조건인가'에 따라 나뉜다고 그는 설명한다.
윌 스미스 사건을 두고 몇몇은 윌 스미스 가족이 약자는 아니기 때문에 저 정도 농담은 괜찮다고 하지만, 신형철은 "유명인을 향한다고 해서 조롱이 풍자로 변하지 않는다. 유명인이라면 감수해야 할 고통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은 가학을 합리화하는 궤변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제이다의 탈모증과 같이 개인의 선택이 아닌 조건/특성은 웃음거리가 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외모와 성별, 인종, 장애, 죽어가는 사람과 죽음 자체가 웃음거리가 될 수 없는 이유다.
주변에 선을 넘는 무례한 이들이 무엇을 가지고 농담을 하는지 떠올려 보자. 만약 그가 조롱을 농담으로 착각한다면 알려주자. 해도 되는 조롱은 없으며, 조롱으로 느끼는 쾌감은 저급한 쾌감이라고 말이다.
무례함에 나를 지키는 방법
사회생활과 대인관계를 망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선을 넘는 빌런들 중에서도, 그 무례함을 의도했다기보다는 사회성이나 소셜 스킬이 부족한 케이스도 있을 것이다. 대개 말로써 무례해지는 경우는 소위 '티키타카'에 실패한 경우다.
김수현 작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상대는 내게 공을 던지는데 나는 조금도 받아치지 못하면, 그때부턴 놀이가 아닌 폭력이 되고, 상대는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가해자가 되어 버린다." 의도와는 상관없다. 내가 무례함을 느꼈다면, 내가 불쾌함을 느꼈다면 상대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이해 못 할 빌런들이 존재한다. 상대가 상처받을 걸 알면서 일부러 모욕을 하고 비꼬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나를 지킬 수 있을까? 크리스 록의 무례한 발언에 윌 스미스는 어떻게 반응을 했어야 할까?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펜싱 금메달리스트인 나희도를 이긴 상대 선수가 모욕을 준 장면에서 나희도가 대처한 모습이 인상 깊었다. "나희도 별거 없네? 우연히 금메달 하나 딴 거 가지고 방송 나오고 쇼를 다 하더니"라고 말한 상대를 향해 나희도는 흥분하지 않고 말한다.
"너한테 졌으니까 할 말 없고. 아까 시합할 때 네가 내 수를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들던데. 역시 그랬구나. 말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사회성 좀 챙기고. 우리 이제 어른이다. 시합 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