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폭력에 희생된 국민보도연맹원, 빨치산 협력 용의자 등과 그 가족들을 감시했던 명부 대공바인다.
진실화해위원회
또 경북 청도군 청도경찰서에서도 소중한 자료가 나왔다. 청도군 내 1개읍 8개면 지부의 보도연맹원들이 2138명인 사실과 보도연맹원 및 '빨치산 협력자'라는 혐의로 학살당한 이들을 감시한 서류인 '대공바인다(1972년)'가 그것이다. 이 문서는 청도경찰서 보안계가 한국전쟁 전후 청도지역에서 처형된 사람의 기록과 그 가족, 보도연맹원, 요시찰인, 관찰보호대상자, 사찰전과자 등의 동향을 파악하고 관리하기 위해 작성한 문서다.
또한 <보도연맹원명부>에는 국민보도연맹원의 정당과 직업이 상세히 분류되어 있다. 1979년에 작성된 <대공인적위해자조사표>는 1972년에 작성한 <대공바인다>를 전산화하기 위한 것으로 한국전쟁 전후 국가권력에 의해 학살된 총 430명의 신원정보가 기록됐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물론 이 문서는 사건 발생 20년 후에 작성돼 아주 정확하지는 않지만, 한국전쟁 시기에 경상북도 청도군에 얼마나 피해가 컸는지 알려준다.
곰티재에서 골로 간 이들
한국전쟁 발발 후 경북경찰국의 명령을 받은 청도경찰서는 관내의 보도연맹원들을 예비검속했다. 각북지서 역시 보도연맹원들을 붙잡아 들였는데, 각북면 삼평리의 박장희(1921년생, 박재원의 부친)도 거기 있었다.
경찰들이 박장희를 뒷결박지어 끌고 간 지 며칠 후 그는 곰티재로 끌려갔다. 청도군 매전면에 있는 곰티재는 한국전쟁 전부터 죽음의 땅이었다. 빨치산 활동지였던 청도군 운문산과 비슬산 인근 마을의 주민들은 '공비 협력자'로 분류돼 곰티재에서 학살당했다.
곰티재는 한국전쟁 발발 후 다시 학살터가 됐다. 1949년 11월 1일 대구경찰서에서 발족식을 연 경북보도연맹은 각 시군 보도연맹을 결성했다. 청도군보도연맹 결성 시점은 불분명하지만, 1개읍 8개면 지부에 총 2138명이 가입했다. 이들은 국가 시책대로 '남·북로당 반대'와 '대한민국 절대 지지' 구호 아래 반공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국민으로서 보호해준다'던 약속은 6.25가 발발하자 사라졌다. 지서와 청도경찰서에 예비검속된 이들은 코발트광산과 곰티재 등지에서 학살당했다. 당시 곰티재에는 큰 구덩이가 파여 있었고 군 트럭에서 내린 이들은 구덩이 앞에서 부들부들 떨며 서 있었다. 한여름이지만 절로 오한이 들었다. 잠시 후 경찰 총구에서 불이 붙었다. 보도연맹원들은 구덩이로 머리를 떨구었다.
박재원의 부친인 박장희 역시 곰티재에서 학살당했다. 남편을 잃은 예종경은 화병으로 2년도 안 돼 세상을 떠났다. 졸지에 천애고아가 된 박재원은 큰아버지 집으로 보내졌다. 그는 간신히 초등학교는 다녔지만 도시락을 싸갈 수 없었다.
밥하다 이웃집 불태운 어머니
휴전협정이 무르익을 무렵 1953년 봄 청도군 청도읍 운산동에서 불이 났다. 마을 사람들은 대야와 양동이, 냄비에 물을 퍼 열심히 불을 껐다. 하지만 불은 꺼지지 않았고 결국 여섯 집이 불타고 말았다. 알고보니 마을 주민 박분악이 저녁을 하다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아궁이에서 불이 나서 불씨가 다른 집으로 번져 큰 불이 됐다. 여섯 집이 홀라당 타버렸으니 박분악은 정신줄을 놓았다. 이후 그녀는 논밭을 팔아 여섯 집을 다시 지어주고도 청도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 길에는 아들 김정섭(1948년생)이 동행했는데 다행히 실수가 인정돼 벌금으로 마무리됐다.
박분악은 왜 그런 실수를 저질렀을까? 4년 전 박분악의 남편 김영호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뒤로 박분악은 정신이 왔다갔다 했다. 1949년 7월 22일 집으로 들이닥친 경찰은 '잠시 조사할 게 있다'며 남편 김영호를 청도경찰서로 데려갔다. 김영호(1923년생)는 마을에서 묵묵히 농사짓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잘못이 있다면 빨치산 주무대였던 청도군 매전면 곰티재 맞은편 마을에 살았다는 점이었다.
그는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3일간 취조를 받다가 1949년 7월 25일 청도군 매전면 곰티재에서 처형됐다. 김정섭의 외삼촌 박정환이 청도경찰서에 수소문해 학살 장소를 알아내어 시신은 수습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 김영호를 잃은 김영욱은 청도중학교 1학년 때 당숙 김영욱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는 '꿈'이 없었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집안 아저씨 집에 양자로 들어갔으니 그럴 만했다. 상급학교인 대구농림고등학교는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하루 6시간 수업 중 3시간이 실기였는데 삽과 괭이를 들고 땅을 파거나 똥장군도 졌다. 1학년 기말시험에서 120명 중 98등을 했다.
양아버지가 그를 타이르자 김정섭은 "아버지요. 공부 열심히 하면 제가 달라는 대로 줄 낍니까?"했다. "그럴 끼구마" 김정섭은 공부에 집중하면서 양아버지에게 용돈을 받아내 하고 싶은 일을 실컷 했다. 복싱과 태권도를 배우고, 극장을 내 집 드나들 듯했다. 꿈을 상실한 김정섭에게는 운동과 영화가 전부였다.
그래도 학업은 충실히 해, 1학년 2학기에는 120명 중 2등을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내내 실장을 했다. 대구농림고 졸업 후 1969년 4월에 교육대학 교원양성소에 입학했다. 그해 9월 8일 청도군 각남면 대산국민학교에 발령받았다. 교직 발령 때 신원조회가 문제가 됐다. 다행히도 청도군 화양면사무소에 근무하던 둘째 외삼촌 박우환이 청도경찰서 경찰에게 부탁해 무사히 넘어갔다.
뒤늦게 역사와의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