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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이유서'에 반유신 신념 담아

[김삼웅의 인물열전 / 정의의 구도자 함세웅 신부 평전 21] "나는 왜 유신체제를 반대하는가?"

등록 2022.04.27 16:25수정 2022.04.27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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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석헌 선생과 함세웅 신부
함석헌 선생과 함세웅 신부함세웅
 
함세웅은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았다. 1심에서 5년, 2심에서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래서 상고를 하였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상고 이유서를 썼어요. 형을 감량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시대의 증언을 위해서 썼습니다. 유신과 이 체제가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포악한 체제인지 증언하고, 왜 내가 사제이자 신앙인으로서 이 일에 뛰어들고 항거해야 하는가, 왜 학생들과 시민들과 함께 해야 하는가, 이런 연대적인 의미, 해방신학적인 의미를 정리하면서 모든 분에게 드리는 편지형식으로 생각하고 썼습니다." (주석 7)

옥중에서 집필한 〈상고 이유서〉는 정의구현사제단의 각종 미사에서 낭독되고, 복제되어 전국의 성당은 물론 일반 국민들 사이에 널리 읽혔다. 현대판 '사발통문'이었다. 당국이 이 문건을 금서 목록에 올렸다.

1976년 2월 3일 법원에 제출한 〈나는 왜 유신체제를 반대하는가〉라는 제하의 〈상고 이유서〉는 장문의 논설이다. 박정희 시대 수많은 양심수들이 각자 대법원에 상고를 하면서 그 이유를 밝혔는데, 함세웅의 이유서는 질량 면에서 보기드문 역작이다. 이념적 경직성이나 소속된 집단의 폐쇄성을 뛰어넘고, 현학적인 논제가 아닌 논리적 정합성을 제시하였다. 어지간한 책 한 권 분량인 〈상고 이유서〉의 목차와 머릿 부문, 꼬리부문을 소개한다. 

 목차

Ⅰ. 왜 유신체제를 반대하는가

 우리가 요구한 것
 폭력의 아들 앞에 머리 굽힐 수 없다
 유신체제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명백한 '폭군적 압제'의 체제이다.
 유신체제 아래서의 인권의 운명
 사회안전법 : 합법적인 인권박탈의 전형적인 예
 유신체제가 있는 한 자유도 정의도 평화도 통일도 없다


 Ⅱ.유신체제 아래서의 크리스천의 길

 크리스천은 누구인가?
 크리스천의 사명 중 하나는 바로 억압의 타파이다
 '중립'은 없다


 Ⅲ.억압받는 이들의 곁으로

 인간성의 회복
 교회의 모든 자원으로 민중운동을 도와야 한다
 민중운동과 민주화운동
 억압이 있는 모든 곳에 해방을 선포하는 교회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Ⅳ. 오늘의 십자가

 마음과 목숨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침묵을 깨뜨려야 한다
 압제에 반대하는 그것은 곧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신앙의 방패를 잡고 십자가의 전술로
 이곳에서 나는 꿈을 봅니다
 석방을 바라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양들을 위하여 
 신학생 시절의 함세웅.
신학생 시절의 함세웅.함세웅
 
                         나는 왜 유신체제를 반대하는가?

본인은 상고를 하였는데 그것은 대법원에서 무슨 올바른 판결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이 시대 우리 모두의 공통된 슬픔은 유신체제하에서 사법부에 - 유신체제의 대통령이 임명한 법관들로 구성되고 유신헌법을 지상규범이라 하여 지지하는 사법부에 - 우리가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귀 법원에 대하여 할 말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제부터 본인이 하려는 말은 정의와 평화, 그리고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 자매들게 향한 것입니다. 물론 그들 중에는 대법원 판사로서 본 사건을 심리하실 자연인들도 포함될 수는 있습니다. 

이 글에서 본인은 한 사람의 크리스찬으로서 왜 유신체제를 반대하지 않을 수 없는가 하는 그 이유를 밝히고 아울러 유신체제하에서의 크리스찬의 나아갈 길과 민주 민생운동을 위한  교회의 자세 등에 관하여 몇 가지 생각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또한 한 사람의 크리스찬으로서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둠이 내리덮인 이 옥중에서, 이 시대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가둔 이 이상한 성스러움으로 가득찬 암흑 속에서 우리는 크리스찬의 길을 걷는 모든 이들에게 마음속 깊은 데서부터 우러나오는 인사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곳에서 약 1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벽. 바로 이 벽. 육중한 자물쇠로 굳게 잠겨진, 모든 것을 차단해버리고 인간다운 모든 것을 밀봉해버린, 산생명을 미이라로 만드는 이 암흑의 벽이 가로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범 탄압으로 악명 높았던 짜르 치하의 제정 러시아에서도 죄수들은 감방에서나 또는 유형지에서 독서와 집필이 허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유신체제의 감방 안에서는 집필은 물론 독서마저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글을 쓸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기회는 이와 같은 상고 이유서를 쓸 때 뿐입니다.  (주석 8)

잃어버린 양들을 위하여

우리 사회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길을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따랐던 사람이 있는데 그는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마는 평화시장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1972년 11월 13일 스물둘의 젊은 나이로 분신자살하였던 재단사 전태일입니다.

그가 분신자살을 결심하였던 순간에 쓴 것으로 보이는 수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을 나는 지금 이 시각에 여러분과 함께 하는 끝 기도로 삼고 싶습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理想)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숱한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이 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나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 다 함께 기도합시다. (주석 9)


주석 
7> 앞의 책, 150~151쪽.
8> <암흑속의 횃불(2)>, 242~243쪽.
9> 앞의 책, 260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정의의 구도자 함세웅 신부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함세웅 #함세웅신부 #정의의구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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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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