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 시절의 함세웅.
함세웅
나는 왜 유신체제를 반대하는가?
본인은 상고를 하였는데 그것은 대법원에서 무슨 올바른 판결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이 시대 우리 모두의 공통된 슬픔은 유신체제하에서 사법부에 - 유신체제의 대통령이 임명한 법관들로 구성되고 유신헌법을 지상규범이라 하여 지지하는 사법부에 - 우리가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귀 법원에 대하여 할 말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제부터 본인이 하려는 말은 정의와 평화, 그리고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 자매들게 향한 것입니다. 물론 그들 중에는 대법원 판사로서 본 사건을 심리하실 자연인들도 포함될 수는 있습니다.
이 글에서 본인은 한 사람의 크리스찬으로서 왜 유신체제를 반대하지 않을 수 없는가 하는 그 이유를 밝히고 아울러 유신체제하에서의 크리스찬의 나아갈 길과 민주 민생운동을 위한 교회의 자세 등에 관하여 몇 가지 생각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또한 한 사람의 크리스찬으로서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둠이 내리덮인 이 옥중에서, 이 시대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가둔 이 이상한 성스러움으로 가득찬 암흑 속에서 우리는 크리스찬의 길을 걷는 모든 이들에게 마음속 깊은 데서부터 우러나오는 인사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곳에서 약 1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벽. 바로 이 벽. 육중한 자물쇠로 굳게 잠겨진, 모든 것을 차단해버리고 인간다운 모든 것을 밀봉해버린, 산생명을 미이라로 만드는 이 암흑의 벽이 가로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범 탄압으로 악명 높았던 짜르 치하의 제정 러시아에서도 죄수들은 감방에서나 또는 유형지에서 독서와 집필이 허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유신체제의 감방 안에서는 집필은 물론 독서마저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글을 쓸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기회는 이와 같은 상고 이유서를 쓸 때 뿐입니다. (주석 8)
잃어버린 양들을 위하여
우리 사회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길을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따랐던 사람이 있는데 그는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마는 평화시장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1972년 11월 13일 스물둘의 젊은 나이로 분신자살하였던 재단사 전태일입니다.
그가 분신자살을 결심하였던 순간에 쓴 것으로 보이는 수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을 나는 지금 이 시각에 여러분과 함께 하는 끝 기도로 삼고 싶습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理想)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숱한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이 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나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 다 함께 기도합시다. (주석 9)
주석
7> 앞의 책, 150~151쪽.
8> <암흑속의 횃불(2)>, 242~243쪽.
9> 앞의 책, 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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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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