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사진
성공회대학교 모두의화장실 인스타그램
'차별과 마주하기'를 택하고 나니 보이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화장실을 가지 못해 방광염에 걸리는 성소수자가 있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다가 부당하게 해고당한 노동자, 코로나 이후 자동문이 폐쇄되며 건물 출입 자체가 어려워진 장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아는가(관련 기사:
뛰거나, 참거나... 화장실 때문에 외출이 고역인 사람들 http://omn.kr/rldm ).
그런 맥락에서 나 역시 차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야외 판매 아르바이트를 하다보니 거기서 매일같이 겪는 성희롱에서 나를 보호할 방법을 찾지 못하기도 했고, 용모단정 등 면접을 볼 때 여성에게만 붙는 '꾸밈노동' 조건 또한 봐야 했다. 새로운 곳에 갈 일이 생기면 나의 가치관을 어디까지 드러낼 수 있을까 고민해야 했고, '당신 페미니스트냐'고 누군가 무심코 던진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긴장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을 개인만의 일로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 이는 차별을 묵인하는 사회구조의 문제이며, 우리 모두에게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커다란 한계는 바로 타자화다. 특정 대상에 대한 시혜, 동정, 멸시는 모두 '배제된 영역'으로 그 대상들을 몰아넣는 행위이다. (...) 남의 일이 '우리의 문제'임을 꾸준히 인식하는 노력은 최소한의 정의일 것이다."
책 <사람, 장소, 환대(문학과지성사)> 속에 나오는 문장이다. 무수한 다양성이 가려진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들이, 사실 얼마나 편협한지에 대해 우리는 고민해볼 필요나 계기조차 없고, 이를 남의 일로 여기며 선을 긋고 살기 바쁘다. 시스템 속에 안전하게 범주화된 채 시혜와 배려를 장착하고 '나는 차별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여기는 게 가장 안전하고 편하기 때문이다. 최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이동권 시위를 두고 오가는 이야기만 보더라도 그렇다.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는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동권 투쟁이 서울시민의 아침을 볼모로 잡고 있다'는 발언을 했다. 차별의 역사 앞에서 그의 말이 얼마나 기만적일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그동안 사람들로 빼곡한 출근길 지하철에, 휠체어를 타고 나갈 수나 있었을까?
이준석 대표 말대로라면, 휠체어 장애인은 그 시간에는 영영 지하철을 이용하지도 말라는 얘기인 걸까? 국가의 역할은, 사람들의 혐오를 조장해 싸움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질문에 응답하는 일이다. 또한 우리의 역할은, 타인이 겪는 혐오와 차별을 공동체의 문제로 인식하며 외면하지 않고 계속해서 물음표를 던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별금지법은 그 바탕이 돼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