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영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박광온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 그리고 제가 사는 지역구의 한준호 국회의원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삼송동에 살고 있는 나영이라고 합니다.
어릴 적 학교에 다닐 때부터 "국군 장병 아저씨께"로 시작하는 위문편지처럼 낯선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는 참 쓰기 싫은 글 중 하나였지만, 오늘은 수신인의 이름에 적은 네 분의 국회의원과 더불어, 국회에 있는 다른 모든 의원 분들도 꼭 읽어보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편지를 씁니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성소수자들이 의원님들께 보내는, 열두번째 편지이자 이 릴레이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편지가 전달되는 날은 국회 앞에 있는 미류와 종걸, 두 활동가의 단식 23일차가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단식 23일차'라는 날은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랐음에도 결국 오늘까지도 차별금지법/평등법이 제정되지 못해 이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매우 무겁고, 속상하고, 화가 나는 마음을 솔직히 가눌 길이 없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이번 주부터는 더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마음으로 동조단식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결국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으니 우선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저는 올해로 40대 중반이 되었고, 기독교인입니다. 어느새 나이가 많이 들어 인지장애가 시작된 열다섯 살 된 개와 아직 철부지처럼 뛰어다니는 세 살 된 고양이도 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제법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있고 사람 만나는 일을 좋아합니다. 날마다 오전 11시 반쯤 되면 점심식사로 무엇을 먹을지 생각하고, 오후 네 시경이 되면 저녁식사는 뭘 할지 고민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제가 일상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흔히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평범하지요?
그런데 저에 관한 어떤 이야기들은 저를 좀 더 심각한 사람으로 여겨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가령 제가 이혼한 가정에서 아버지 없이 자란 자녀라는 이야기라든지, 페미니스트라는 사실 같은 것 말이지요. 이에 더해, 제가 동성 파트너와 함께 사는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면 그 순간 저의 성적지향은 저의 다른 모든 정체성과 일상을 덮을 정도로 중차대한 문제로 여겨지고는 합니다. 참 이상하죠. 40대 중반의 삼송동 주민인 저와 동성애자인 저는 왜 그렇게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일까요?
최근에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는 피켓을 들고 국회 앞에 서 있었더니, 차별금지법이 무슨 동성애자 만드는 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해하고 계신 분들이 제 앞에 서서 "여자끼리 어떻게 섹스를 해!"라며 소리치고 가시더라고요. 피켓에 여자와 섹스하자는 문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말하는 순간, 아니 그렇게 간주되기만 해도 저의 삶과 다른 일상은 완전히 삭제되어 버린 채 저란 존재는 이렇게 '섹스'로만 각인되어 버린답니다.
놀랍게도 차별금지법 제정은 지금까지 이런 이유로 15년을 미뤄져 왔습니다. 성소수자의 삶은 곧 섹스로, 이주민의 삶은 피부색이나 출신 국가로, 아픈 사람의 삶은 질병 그 자체로만 규정되고, 그것이 차별금지의 대상에서 삭제해도 되는 이유가 되었으니까요.
"너희끼리 알아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래 너희들끼리 좋다는 건 알겠으니 그냥 너희끼리 알아서 살아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집도 구해야 하고, 아프면 병원에도 가야 하니까요. 가족, 친구, 동료 등 다른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충분히 애도하고 추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편지에서도 보셨듯이 차별금지법이 없는 세상에서 저와 저의 파트너, 여러 친구들은 어쩌면 평범할 수도 있는 그런 일상을 너무 자주 침해당하고는 합니다.
저 역시 이제 16년차인 동갑내기 파트너와 함께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고민이 깊어집니다. 유산이나 연금, 보험 같은 것들은 기대할 것도 없이, 그저 몸이 아플 때 병원에 가는 것만 해도 걱정이 앞섭니다. 혹시라도 중요한 순간에 서로의 보호자로 인정되지 못하거나 의료기관에서 차별적인 대우를 당한다면 어떻게 해야할지 몇 개의 시나리오를 생각해 둡니다. 주거지를 옮길 때면 이사하는 집의 집주인이 혹여 우리 관계를 알고 거부하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지 긴장하고는 합니다.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파트너가 배제되거나 소외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유언장을 써둡니다. 그렇지 않으면 16년을 함께 산 우리의 관계는 일순간에 수많은 제도적인 차별의 장벽 앞에 놓이게 되니까요. 이런 것이 차별의 현실입니다.
그 누구도 이 사회와 단절되어 "너희끼리 알아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차별금지법은 그저 누군가를 인정할지 말지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함께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누군가의 삶과 건강, 생존에 관한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성소수자들이 보낸 열한 통의 편지들 속에도 그 모든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혹시 아직도 안 읽으셨다면 꼭 읽으시길 바랍니다. 용기와 요구를 담아 꾹꾹 눌러 쓴 그 이야기들을 기억하시고, 차별금지법 제정이 민생을 책임지는 국회의원의 역할임을, 이것이 민생의 문제임을 생각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