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는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마술 같은 것"

[인터뷰] 국제로타리 3620지구(충남) 문수협 SNS위원장

등록 2022.05.04 09:13수정 2022.05.04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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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로타리 3620지구(충남) 문수협 SNS위원장 .
국제로타리 3620지구(충남) 문수협 SNS위원장.최미향

그는 오늘도 무거운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행사장을 누빈다. 때로 장비가 무거워 팔이 아파도 아픈 줄 모르고 시간을 보내다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그는 아픈 어깨를 시트에 뉘이는 사람이다. 그러다가도 로타리 행사장이 생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카메라를 메고 렌즈 속에 사람을 담아내는 참 무딘 사람.

지난 1일, 왜 카메라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냥"이란다. "그냥 카메라로 세상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란다. 처음으로 거금을 들여 산 카메라로 눈과 가슴에 담을 물체를 30년째 렌즈에 담는 문수협 국제로타리 3620지구(충남) SNS위원장. 찻집 창가에 앉아 지나온 삶의 발자취를 들어보았다.

- 고향은 어디며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달라.
"서울 어린이대공원이 개장했다는 소리가 연일 뉴스를 타고 흐르던 1973년 그해 5월, 태안군 안면도 신야리 샛별해수욕장 인근에서 남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아이가 바로 1남 2녀 중 첫째로 세상에 태어난 남평문씨 21대손 문수협이다.

나의 어린 시절은 농사반 어업반으로 늘 바쁜 가족들을 대신하여 바닷가 해당화를 간식 삼아 먹고 자랐다. 또 그때는 친구들로부터 농협, 축협, 수협, 신협이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나도 멋진 이름을 가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지금은 제법 재미난 이름 하나로 내 이름 석 자를 금방 각인시키는 재미도 있지만 말이다.

속상할 때면 집 대신 바다로 나가 애꿎은 모래를 던지며 고기잡이배를 몰고 이른 아침에 나간 가족들을 기다렸다. 저 멀리 불빛을 밝히고 돌아오는 배를 보면 할아버지일까 싶어 한달음에 달려가 손을 흔들곤 했다.

어느 날은 어두운 밤을 몇 번이나 보내도 할아버지 배가 돌아오지 않았다. 당신은 그렇게 2박3일을 망망대해 바다에 떠다니시다 구사일생으로 돌아와 나를 안아주시며 '우리집 장손 장손~'하시며 뺨을 부비셨다.

나는 그때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빼어날 수 (秀), 도울 협(協) '수협(秀協)'이란 이름이 어쩌면 하늘의 도움으로 가족의 안녕을 염원하는 깊은 뜻이 담겨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회원들 사진 촬영중 .
회원들 사진 촬영중.최미향
 
- 부모님의 교육관은 무엇이며, 당시 재미난 에피소드는?
"우리 부모님은 항상 자립심을 강조하셨다. 그래서일까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 빨리 돈을 벌고 싶어 가출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당찬 애다(웃음). 어느날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부모님이 모아놓은 10만 원을 훔쳐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뒷칸에 앉아 흙먼지를 풀풀 날리며 자꾸만 멀어지는 우리집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짠하며 울컥 눈물이 흘렀다. 사내대장부가 큰 꿈을 그리는데 울면 안된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금새 소매로 쓱 닦고 고개를 돌렸다. '하루빨리 성공하여 가족들을 호강시켜주자'고 다짐했다.

한겨울이었지만 내가 입은 옷은 얇디얇은 가을 옷이었다. 서울은 왜 그리도 추웠던지 안면도 바람은 바람도 아니었다. 돈 벌어 자수성가하겠다며 벽보에 붙어있는 '시다구함' 네 글자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인력사무실이었다.

누가 날 데리러 왔고 내가 내린 곳은 경기도 구리시였다. 지하에는 가내수공업을 하고 있었고 2층에는 4명의 직원이 숙식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한 달 월급 10만 원. 나는 그곳에서 두 달간 열심히 일을 배워나갔다. 하지만 나의 무모한 탈출은 60일 만에 끝나버리고 말았다.

어느날 막내 이모와 전화 연결이 됐고 '가족들이 찾고 난리 났다'는 소식에 그만 모든 것을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끔 생각해 본다. 당시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면 나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회원이 찍어준 사진 .
회원이 찍어준 사진.최미향
 
- 가출소동이 60일 만에 막을 내렸다. 학창시절은 순탄했는지?
"앞에서도 말했지만 내 이름 자에 도울협이 있어서인지 도와주시는 선생님들이 많았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모두 그랬다. 특히 중3 담임을 맡았던 안성호 선생님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분이시다. 한때 예산교육지원청 교육장으로 근무하셨던 그분은 나의 일탈을 다독여주시며 꿈을 꾸고 실현할 수 있도록 많은 고민과 노력을 보태주셨다. 덕분에 나는 무사히 상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화그룹에 입사했다.

시인 이성복은 '스승은 생사를 건네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생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스승이라고, '죽음의 강을 건널 때 겁먹고 급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이쪽으로 바지만 걷고 오라'고 하는 게 스승이라고. 소크라테스가 그랬고 몽테뉴가 그랬다. 조만간 스승님을 찾아뵙고 긴 얘기를 나눠야겠다."
 
박상철(왼쪽) 가봉대통령 경호실장 .
박상철(왼쪽) 가봉대통령 경호실장.최미향
 
- 아프리카에서 생활했다고 들었는데 당시 얘기를 해 달라.
"22살이었다. 다닌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경험을 하고 싶어 종합상사에 입사하여 적도 부근 아프리카 가봉으로 파견되었다. 낯선 국가에서 일한다는 것은 가장 먼저는 두려움이었다. 서울에서 파리까지 13시간. 그곳에서 1박을 하고 7시간을 거쳐 아프리카에 닿았다. 한겨울 점퍼를 입은 내게 가봉의 30도 기온은 그야말로 죽음이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가봉은 현지어와 불어를 공용으로 사용한다. 회계업무 지원을 했던 나는 무엇보다 10여 명의 현지 직원과 소통하기 위해 언어를 배우는 일이 급선무였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클럽에 자주 가 그나라 언어를 배웠다. 그만한 공부가 없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 유행하고 있을 때였는데 특히 고향 생각이 날 때면 클럽 한 켠에 앉아 한국 노래를 들으며 밤을 새웠다. 그때 만난 박상철 가봉 대통령 경호실장님과의 인연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가봉 주재원 근무시 지방 출장에서 .
가봉 주재원 근무시 지방 출장에서.최미향
 
- 살아가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현지인들이 비싼 말라리아약을 구하지 못해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 가봉에 도착했을 때였다. 몸이 좋지 않다고 하니 무조건 말라리아를 의심했고 약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덜컥 겁이 났다. 혹 아니더라도 예방 차원에서 미리 처방받아 먹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 약을 받았다.

그들은 내게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고 했고, 나는 무척 쓴 약을 인상 쓰며 겨우 씹어 넘겼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쓴 약이었다. '그냥 먹어도 쓴 약을 왜 굳이 씹어먹냐'고 했더니 그들 또한 이유를 모른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처음 도착하는 주재원들에게 장난삼아 그런다고 했다.

그래도 여전히 몸이 이상했다. 꼭 말라리아에 걸린 것 같기도 하고 감기 같기도 하고. 다시 말라리아 주사를 맞으라고 했다. 그것도 하루에 한번씩 이틀동안 양쪽 엉덩이에 각각 한 번씩 말이다. 인정사정 없는 간호사의 손길. 멍이 들 정도로 아팠다. 며칠 후 차도가 없자 링거에 약을 타서 꽂아주기까지 했는데 다 들어가면 집에서 빼라고 했다.

혹시라도 말라리아 감염으로 사경을 헤맬까 봐 시키는 대로 하긴 했지만, 무섭기도 하고 기가 차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내겐 그때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얼마나 놀랐던지(웃음)."
     
- 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
"아프리카 가봉 생활이 무료해질 때 즈음이었다. 일상을 달래기 위한 취미로 당시 한 달 치 월급을 모아 필름을 사용하는 수동카메라 '니콘 FM2(Nikon_FM2)'를 89만 원에 구입했다. 사진기법은 가봉 현지에서 사진관을 운영하시는 교민으로부터 배웠다.

쉬는 날마다 나는 구석구석을 다니며 필름에 현지 모습을 담아 인화를 해나갔다. 그러던 중 갑자기 회사가 기울게 됐고,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때는 제대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나왔다. 그리운 추억들도 참 많다. 무엇보다 가봉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사진을 찍으며 봉사를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나는 한국으로 나와 대학에서 세무회계학을 전공했고 20년째 서산 한화토탈에너지스 주식회사에 몸담고 있다."
서산시장 표창장을 받으며 .
서산시장 표창장을 받으며.최미향
 
- 국제로타리란? 로타리클럽과의 인연은?
"국제로타리는 세계적으로 소아마비 퇴치에 힘쓰고 있는 세계최초의 봉사 클럽이다. 한국로타리는 19개 지역 1689개의 클럽에 6만 7000여 명이 가입되어 있다. 여기에 내가 속해있는 3620지구는 95개 클럽에 4000여 명이 참여, 국내·국제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지인의 소개로 2017-18년도에 국제로타리 3620지구 서산보라매 로타리클럽에 입회하게 됐다. 로타리클럽에 대한 기본 지식이 전무한 상태로 무작정 카메라를 메고 사진 봉사를 했다. 그러면서 봉사에 눈 뜨게 됐고, 카메라가 매개체가 되어 클럽과 한 몸이 됐다. 5년 전, 국제로타리에 가입하여 현재 '국제로타리 3620지구(충남)에서 SNS위원장을 맡고 있다.

집사람이 먼저 서산국화 로타리클럽에 입회했다. 그 뒤를 따라 입회하게 된 케이스다. 막상 들어와 보니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뭘까'를 생각하게 됐다. 그것이 바로 20대 때부터 찍었던 사진이다. 사진 봉사를 맡으면서 서산 지역기자를 1년 하고 지구기자를 1년 했다.

확실한 봉사를 하기 위해 거금 1000여만 원을 투자하여 카메라를 구입했다. 12개 클럽을 미친 듯이 쫓아다니며 렌즈에 로타리행사 사진들을 차곡차곡 담아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힘에 부치면서 기자직을 내려놨다. 로타리와 함께 서산지역을 얼마나 알렸는지 서산시 시장님으로부터 표창장까지 받았다.

그 후 카메라만 가지고 행사에 참석하면 무조건 기자로 인식하여 사진을 부탁했다. 나는 한사코 기자가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그것은 허공으로 사라지는 포말이었다. '기자면 골고루 찍어줘야지 왜 아는 사람만 찍냐'며 항의를 받기도 여러 번. 하나하나 쌓이다 보니 나름 상처를 받기도 했다. 선의가 화살이 되어 돌아오는 걸 경험하면서 내적 갈등도 심해졌다.

그렇다.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맘속 흔들림을 내려놓았기에 이런 얘기도 편하게 할 수 있는 거다(웃음)."​
 
행사때 마다 여기를 하트를 외치는 순간 .
행사때 마다 여기를 하트를 외치는 순간.최미향
 
- 국제로타리 3620지구 SNS위원장은 어떤 봉사를 하는지 궁금하다?
"통상적으로 SNS(Social Networking Service)는 소셜 미디어(Social Media)의 한 종류로 분류된다. 인터넷 또는 인트라넷 등 전자 네트워크로 정보를 주고받는 미디어 서비스를 통칭하는 개념인데, 초기만 보더라도 블로그와 메신저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지금은 위키, 스마트폰 마이크로 블로그, 협업툴 등 여러 개념이 추가되고 있다. 이렇듯 SNS직은 엄연히 공적인 공간을 맡은 위원장이다.

나는 로타리 입회 다음회인 2018-19년도 서산지역 지역기자, 2019-20년도에는 3620지구 지구기자, 2020-21년도와 2021-22년도는 지구 SNS위원장으로 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를 통해 국내외 국제로타리 19개 지구 중 3620지구(충남)를 홍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지구 행사 시 사진 촬영 봉사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여전히 나를 기자로 바라보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위의 말처럼 사진으로 인해 속상해하는 분들이 종종 계시다. 이 자리를 빌어 기자와 SNS(Social Networking Service)는 다른 의미란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 봉사를 하면서 가장 보람된 것은?
"직장에 다니면서 휴일에 봉사한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나로 인해 회원들이 기뻐할 때가 가장 보람 있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충청남도 4천여 명 회원이 속해있는 지구행사가 종종 열린다. 그곳에 참여하며 사진 봉사를 하는데 다들 너무 좋아하신다. 특히 총재 회기 말에는 지구에서 회원들 사진을 골라 액자로 만들어 드리는데 그렇게 행복해하실 수 없다. 그 모습을 보면 너무 뿌듯하다. 그래서 또 해나가는지도 모르겠다.

사진을 찍다보면 내 사진은 없다. 내가 나를 찍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한해 두해가 지날수록 여러 회원들께서 사진촬영 하는 내 모습을 찍어 보내주신다. 사진으로 감사패를 만들어 주신 클럽도 있다. 회원들이 참 고맙다."
 
회원들께서 사진으로 만들어 주신 감사패 .
회원들께서 사진으로 만들어 주신 감사패.최미향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봉사는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마술사 같은 게 아닐까? 사진을 찍고 회원들에게 나누어 줄 때마다 본인 모습에 스스로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본다. 그러니 사진 봉사를 그만둘 수가 없다.

나는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 한 나의 달란트로 아낌없이 타인을 위한 봉사를 이어나갈 것이다. 또 그리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제 코로나 거리두기가 해제됐다. 행사장 여러곳에서 카메라를 든 내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모두들 여여하기를 기원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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