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손가락에 몸을 내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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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빠진 채 추는 춤도 즐기게 됐다. 힐링커뮤니티댄스 스튜디오(춤의학교)에 가면,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손가락에 몸을 내맡긴다. 주로 오른쪽 검지부터 까닥거리기를 시작한다. 시작점에 특별한 이유는 없다. 아마 내가 오른손잡이고, 오른손 검지가 엄지를 제외한 손가락 중 가장 익숙하고, 먼저 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
검지 첫마디를 까닥까닥, 두 번째와 세 번째 마디 관절까지 까닥까닥. 그러다 보면 옆 손가락들도 함께 리듬을 탄다. 손가락에서부터 시작한 리듬은 움직이고 싶은 욕구가 되어 몸 전체를 휩쓴다. 손가락이 이끄는 대로 몸을 돌린다. 까닥거리며 앞으로 향하는 손가락을 시작으로 어깨와 상체, 골반과 발도 앞으로 동참한다.
손가락 춤을 추다 보면 이 세상에 나와 손가락만 남은 것 같다. 손가락 뒷 배경은 그냥 배경으로 존재한다.
나와 내 몸만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에 놓여 있는 것 같은 느낌. '그저 존재한다'는 말이 이런 느낌일까. '그저 존재함'의 감각이 이런 즐거움일까. 설핏 웃음이 나온다. 혼자 추는 것 같지만, 내 몸과 함께 추는 손가락 춤은 재미있다. 여럿이 출 때는 어떨까?
춤벗들과 스튜디오에서 놀던 중 각각의 시그니처 움직임을 표현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어떤 움직임으로 기억될까. 어떤 그림이 펼쳐질까 기대하며 기다렸다. 내 앞에 선 십여 명이 모두 손가락을 펼친 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특별한 동작을 그리지도, 빠른 속도로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공간이 그들로 꽉 채워진 것 같았다. 또한 고요했다. 그저 존재했다. 그걸로 충만했다.
손가락 통증이 일깨운 진실
그런데 손가락 춤에 맛들이기 시작한 지 얼마 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침대 위 비몽사몽 상태에서 갑자기 눈이 번쩍 떠졌다. 잠결에 손가락 관절이 구부러졌는데 평소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 저항에 놀라서 잠이 깬 것이다. 구부러진 용수철의 펴지려는 힘을 눌러 막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생전 처음 느낀 손가락 구부림의 어려움. 그때의 충격은 탈모의 순간과 비슷했다. 두피를 문지르는 손가락의 접촉과 함께 머리털이 먼지처럼 끌려 나오는 광경. 당시 거울 속 내 두피는 점점 털 없는 살가죽으로 변했다. 이래선 안 되는데, 이럴 리가 없는데. 그 느낌이 되살아났다. 손가락이 잘 구부려지지 않는 감각이 지속됐다.
이불 끝자락을 잡아 젖히기 위해 의식적으로 손가락에 힘을 더해야만 했다. 이후, 반려묘 웅미의 간식 비닐을 뜯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손가락 관절의 노화나 병증을 느끼기에 30대는 너무 일렀다.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란 충격에 며칠을 보냈다. 걱정도 됐다. 이러다 '손가락 춤'도 못 추는 거 아닐까. 내 몸 안에서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신호는 아닐까.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몸이 쇠약해지면 어쩌지. 이러다 생각보다 빨리... 살아있음이 끝나는 때가 오는 거 아닐까. 그럼 나는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
'죽음'이란 단어는 항암 치료 초기 때만 해도 외계인 같은 말이었다. 낯설었고, 동시에 죽음이라는 것이 슬프고 아쉽게 느껴졌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과 함께 가꾼 우리 집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혼란스러웠다.
거실 소파에 기대어 앉은 내 등의 편안함, 무릎 위에서 그르렁거리는 반려묘의 보드라움, 방 안 침대 위 잠든 반려자의 고른 숨소리를 떠나야 한다는 게 도저히 상상되지 않았다.
두려워하고 싶지 않아서 종교에 빠지려고도 했다. 하지만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말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과정의 무섭고 괴로운 감정들을 어떻게든 토해내야, 죽기 전까지는 그래도, 사는 것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 후 몸이 항암 약물을 거부하는 반응을 일으켰다.
몸이 알려줬다. 몸과 맘이 분리된 이 상황을 회복해야 사는 것처럼 살 수 있다고. 몸에게 용서를 구하고 감사해하는 시간을 지나며, 자연스럽게 몸과 맘의 두려움을 움직임으로, 느낌으로 승화했다. 춤을 많이 추게 됐다.
함께, 손톱의 춤을 추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