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쿠데타 당시의 박정희 소장(가운데)과 그를 경호하는 박종규 소령(왼쪽) 및 차지철 대위(오른쪽)의 모습.
5월 16일은 육군 소장 박정희가 주동이 되어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 발발 61년이었다. 1961년 이날 새벽, 박정희 주도로 육군사관학교 8기생 일부 군인 등 장교 250여 명과 사병 3500여 명의 쿠데타 세력이 한강을 건너 방송국을 비롯한 서울의 주요 기관을 점령했다. 제2공화국 장면 정부를 강압적으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 이 쿠데타를 공식적으로는 '5.16 군사정변'이라고 칭한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김진기 육군 헌병감 등을 체포한 사건을 '12.12 군사반란'이라고 한다. 이 신군부 세력은 후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장 군인을 동원해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 두 사건은 모두 합법적인 정부를 무력으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탈취했다는 점에서 '쿠데타'다. 그런데도 하나는 '군사정변(政變)'이라고 하고 하나는 '군사반란(反亂)'이라고 한다. '반란'은 말 그대로 '정부나 지도자에 반대해 내란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지만 '정변'은 모호하고 넓은 의미로 '정치상의 큰 변동'을 말한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내란죄로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12.12에 '반란'이라는 용어를 명백하게 사용했지만, 박정희는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5.16을 모호하게 '정변'이라고 한 것으로 풀이된다.
아무튼 5.16과 12.12 군사 쿠데타를 획책한 인물들이 단죄되지 않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는 점도 커다란 논란거리 중 하나다.
박정희 등 쿠데타에 성공한 군인들은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입법·사법·행정권 등 3권을 통합·장악한다고 선언했다. 또 혁명에 필요한 조치로 금융 동결, 항구와 공항의 폐쇄, 정권의 인수, 의회의 해산,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 등을 선포하고, 6개 항의 '혁명공약'을 내걸었다. 쿠데타 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3년간의 군정통치에 착수했다. 이들은 핵심적인 권력기구인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이를 근간으로 민주공화당을 조직했다. 새로 구성될 민간정부를 장악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했으며, 1963년 10월과 11월의 양대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이는 일단의 권력지향적인 군부세력이 불법적으로 합법정부를 전복시키고 권력을 장악한 헌법 유린의 명백한 쿠데타였다. 군부의 불법적인 탈선과 정치개입이라는 선례를 남겨 이후 평화적인 민간정권교체를 어렵게 만들었으며 사회 일반에 군사문화를 강제 이식하여 국민의 의식을 왜곡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김영삼 대통령은 일단 '5.16군사정변'을 '쿠데타'로 규정지었다. 하지만 그 평가는 역사에 맡긴다고 했다. 성공한 쿠데타로 그 주역들을 뒤늦게 처벌할 수 없었던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일련의 쿠데타 과정에 직접 참여한 군인들 중 국립대전현충원에 묻힌 인사들은 김동하, 최주종, 박창암, 김진위, 정명환, 김인화, 이석제, 박원빈, 강상욱 등으로 장군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