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손주 부부와 구순기념 가족문집인 책 <우리아버지 오영선> 출판 기념을 하고 있다.
오안라
오래전 나는 아버지께 백지 편지를 드린 적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편지와 편지지를 나누어 준 선생님은 봉투에는 집 주소를, 편지지에는 아버지께 드릴 편지를 쓰라고 했다. 아마도 어버이날이었을 것이다. 봉투에 집 주소를 적은 나는 편지지를 눈앞에 두고는 좀처럼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쑥스럽기도 했지만 당시 일기란 것도 쓰지 않던 때라 문자로 마음을 표현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색하고 힘들었다. 연필을 쥔 손에 힘만 들어갔지 정작 '아버지께'라는 통상적인 첫 문장도 쓸 수가 없었다.
사각거리는 친구들의 편지 쓰는 소리를 들으며 정작 그 풍경 속에 끼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편지쓰기가 처음인 나에게 한 반에 80명이 넘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생님의 조언은 찾아오지 않았다.
결국 시간이 흘러 한 글자도 쓰지 못한 빈 편지를 제출한 나는 며칠간 가슴이 콩닥거렸다. 빈 편지를 받으셨을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지만 나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구순, 쓰지 못했던 편지를 쓰다
아버지의 구순을 앞두고 오래전 그 일이 떠올랐다. 마음에 걸렸던 그때 쓰지 못했던 글을 지금은 쓸 수 있을 거 같았다. 여전히 글쓰기를 두려워하지만 아버지의 구순을 맞아 더 이상 편지를 늦출 수는 없었다.
작년에 첫 책을 내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써 보고 싶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다. 아버지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정리하셨는데 "지나온 일을 생각해 보니 잘못한 것이 많더구나. 그것을 자세히 떠올려보는 것이 크게 부담이 된다.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은 잠도 포기해야 할 만큼 힘든 일인데 몸 약한 네가 건강을 해치게 된다"는 이유로 아버지에 대한 나의 글쓰기를 만류하셨다.
아버지 말씀으로 쓰지 못한 편지에 대한 부담은 덜었지만, 아버지께 드릴 마음의 골든타임도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글쓰기를 시작하며 글이 갖는 치유의 힘과 관계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경험할 수 있었다. 17명의 가족들에게 구순 기념 가족 문집을 제안한 것도 '각자가 쓰는 아버지에 대한 글이 90년을 성실하게 살아오신 삶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회복시켜 줄 것'이라는 확신에서였다.
더불어 그때는 놓쳤지만 바로 지금이 아버지께 편지를 드릴 수 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관련 기사 :
아버지의 구순, 온 가족이 총출동해 책을 썼습니다).
마침내 가족 문집이 나오고 신기한 듯이 책을 바라보는 가족들에게 소박한 출판기념을 제안했다. 아버지 구순에 모이게 될 2세대 5명을 제외한 나머지 3세대 가족들은 책에 아버지의 사인을 받고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출판기념의 의미를 살리자고 했다.
책의 주인공 아버지에게는 가족들 각자에게 줄 책에 아버지 사인을 해주시라고 했다. 간단한 말씀 한 마디에 아버지 이름을 적어 놓을 것이라 생각했던 나와 달리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줄 책 한 권 한 권마다 편지글을 써 놓으셨다. 이번 문집을 기획한 나에게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실망하지 말고 큰 희망, 영원한 희망을 간직하라"고 격려해주셨다.
할아버지가 보내오는 문자에 늘 정성껏 답글을 달아주는 손자에게는 "너는 늘 내 곁에 있는 것 같구나. 기억하고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이 지혜가 되려면 늘 훈련을 해야 한단다"라는 덕담을 써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