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이항증
경학사
이상룡은 만주에 이주한 뒤, 흩어진 여러 독립군단을 통합하여 대한통의부로 결성하는 산파역을 맡았다. 또한 지린성 독군(督軍, 도지사에 해당)을 만나서 한국과 중국의 역사를 자세히 설명하자 독군이 감복, 찬동했다. 그리하여 동포들의 입적, 개간, 자치, 교육, 무예 등에 적극 편의를 제공해서 우리 동포들이 이전보다 살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지린성 회인현에 정착한 이상룡은 그 뒤 통화, 유하, 해룡, 반석, 서란 등으로 옮겨 살면서도 오로지 동포들의 자치와 조국 독립운동에 이바지하였다. 이주 초기 이시영, 이동녕, 이회영과 함께 민단자치의 중추기관으로 추가가에 경학사를 설치하여, 사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때까지 국경을 넘어온 동포들이 대부분 값싼 황무지를 빌어 화전농사로 가난을 면치 못한 것을 보고, 이상룡이 앞장서서 만주의 넓은 땅을 빌어 억새풀을 베어내고 논을 만들어 벼농사를 경작하여 비로소 동포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만주의 벼농사는 이때가 효시였다.
경학사 창설 이래 가장 심혈을 이룬 사업은 남만주 일대 여러 곳에 소학교를 세우는 것이었다. 소학교를 통해 동포의 자질 향상을 꾀하였다. 아울러 이를 더욱 발전시켜 조국광복에 이바지할 인재 양성를 양성하기 위해 신흥학교를 세워서 국내외 청년을 모아 문무를 겸한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신흥학교는 그 뒤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여 여기서 배출된 3천여 명의 인재가 후일 중국대륙 일대에서 항일 전선의 전위를 담당하였다. 경학사는 이후 부민단으로, 3․1운동 전후에는 한족회로 개편 발전,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요람지가 되었다.
이상룡은 1925년 9월, 상해 임시정부초대 국무령으로 멸사봉공했다. 하지만 끝내 살아서 고향 임청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1990년 유해를 모셔와 국립 현충원 임정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