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오이지애매한 거절로 통화가 끝난 며칠 뒤에는 영락없이 오이지가 도착한다.
장순심
며칠 전, 남편이 "어머니에게 오이 사서 오이지 담가 달라고 말씀드렸어" 했다. 묵은 오이지를 버린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다. 새삼 오이지를 담가 달라고 했다니 일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따라오는 남편의 말이 사뭇 진지했다. 어머니께서 앞으로 얼마나 그런 것을 담가 주시겠냐며, 일거리 삼아 부탁을 드렸다고 했다.
곧 도착할 그 많은 오이지를 어떻게 해야 하나 미리 걱정부터 하는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남편의 설명이 이어졌다. 언젠가 우리도 담가서 아이들에게 보낼지도 모르니 이참에 만드는 법을 익혀두는 것도 좋지 않냐고. 또 지인이 부탁한 것도 있어서 나누면 된다고 덧붙였다. 올해는 어머니의 오이지를 끝까지 제대로 먹어보자고 새삼스러운 다짐까지 했다.
그렇게 해서, 오이는 물론 매실까지 사서 어머니께 가져갔다. 매실은 해를 넘겨도 버려질 염려는 없으니 두고두고 천천히 먹으면 된다. 묵을수록 더 깊은 맛을 내는 것이 매실의 매력이기도 하니까.
그동안 조금씩 쌓인 매실을 얼마 전 친지들에게 나누었더니 맛이 특별히 좋다며 반겨서 내심 뿌듯했다. 매실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은 담가 먹어도 늘 부족하다며 챙겼다. 나는 처분해서 좋고 그들은 받아서 좋은 나눔이 될 수 있었다.
올해 어머니 연세는 87세다. 손도 크시고 베푸는 것도 좋아하시고 솜씨도 있으셔서 아는 사람들은 뭐든 하면 욕심을 내며 서로 가져가려고 한다. 감식초도, 양파즙이나 은행나무 술이나 더덕술도 담그면 다른 이들이 모두 가져갈까 봐 우리 것은 따로 챙겼다가 보내주실 정도다.
자식들을 위해서 담그시지만 다른 이들이 먼저 보고 조르면 주지 않을 수 없다며 우리가 욕심내지 않는 것을 은근히 서운해 하시는 눈치셨다.
뜻하지 않게 오이지가 많이 들어와 한동안 아삭하고 짭조름한 오이지무침으로 밑반찬을 대신했다. 그렇게 먹다 보니 받은 오이지를 모두 먹을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이 먹으면 이렇게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확인했던 것 같다. 김장하듯 오이지를 많이 담그는 이유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던 것 같고.
오이지가 모두 짭짤하고 같은 맛이라고 생각하지만 오이지를 담그는 레시피도 집집마다 모두 조금씩 달랐다. 친정 언니는 소금물을 팔팔 끓여 생오이에 바로 붓는다고 했고, 거기에 매실도 넣고 소주도 넣는다고 했다. 그래야 겉은 잘 삭고 속은 탱글탱글하며 골마지(간장, 된장, 술, 초, 김치 따위 물기 많은 음식물 겉면에 생기는 곰팡이 같은 물질)가 끼지 않는 아삭한 오이지가 만들어진다고 했다.
어머니의 오이지는 달랐다. 어머니의 오이지는 짠맛과 단맛이 적당히 어우러지고 식초가 들어간다. 피클과 오이지의 중간쯤으로 담그신다. 느끼한 것을 먹을 때 짠 기만 조금 빼서 적당히 썰어 맹물에 넣고 파를 송송 띄우면 시원 달콤 새콤한 오이지가 되고, 잘게 썰어 꼭 짜서 양념해서 무치면 전혀 다른 독특한 오이지무침을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