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년만에 부친 죽음의 진실규명을 받은 조희덕씨가 8일 경주포커스와 인터뷰하고 있다.경주포커스
"소감이 뭐 있겠습니까. 우리가 빨갱입니까. 국가가 죄 없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역사에서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지난 6일 1950년 7~8월 경주시에서 일어난 국민보도연맹·예비검속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결정했다. 72년 만에 선친의 억울한 죽음을 국가로부터 공인받은 조희덕(81)씨는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
조씨의 부친 조인환씨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 4일 동생 대신 보도연맹 연루자로 경주경찰서 강동지서에 연행된 뒤 이튿날 집단 학살당했다. 강동지서 순경 2명이 이날 새벽 강동면 유금리 집으로 찾아와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조씨의 삼촌 조극환을 찾았으나 이미 피신한 삼촌을 대신해 부친 조인환(1918년생·당시33세)씨를 연행한 것.
그 직후 부친 조인환씨는 경주경찰서와 육군정보국 소속 CIC 경주지구 파견대에 의해 천북면 신당리 골짜기에서 집단 살해됐다.
아버지 죽음 소식을 들은 조희덕씨는 어머니와 함께 천북면 신당리 학살현장을 찾아가 시신을 찾아봤지만, 형체마저 알 수 없는 200여 구의 시신 더미에서 아버지의 주검은 끝내 찾지 못했다. 당시 조희덕씨 나이 아홉 살 때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4.19 혁명 직후 경주에서는 유족회 중심으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 활동이 활발했다. 경주지역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은 1960년 '경주지구 피학살자 유족회'를 결성하고, '경주지구 피학살자 합동 위령제'를 거행하는 등 정부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사건의 진실규명을 촉구했다.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9월 5일 발족한 경주지구양민피학살자 유족회 회원 수는 860명에 이르렀고 당시 내남면에서 신고된 피학살자 수만 169명이었다.
그러나 유족회 활동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경주지구 피학살자 유족회' 핵심 간부를 포함한 전국의 피학살자 유족회 대표들이 '혁명재판'에 회부되면서 중지됐다. 조씨의 어머니도 그때 모진 일을 겪었다.
1960년 11월 13일, 당시 계림국민학교에서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열린 경주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합동위령제에서 조씨의 모친 이종덕씨는 위령제 준비위원으로 참여해, 억울하게 숨진 남편의 제문을 손수 작성해 낭독했다.
당시 위령제는 경주시장과 월성군수, 경주경찰서장, 대구지법경주지원장, 국회의원 사회단체장이 총출동하고 정부가 예산을 지원해 시민 40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합법적인 행사였지만, 정치군인들은 이를 '빨갱이들의 불순한 집회'로 여겼다.
31살에 남편을 먼저 보낸 조씨의 모친 이종덕씨는 5.16 쿠테타 직후인 1961년 5월 18일, 남편에게 제문을 낭독한 죄로 10여 년 전 남편을 연행해 간 경주경찰서 강동지서 순경에 의해 연행돼 경주경찰서에 4개월 이상 불법 구금됐다. 4개월 동안 이어진 모진고문과 구타로 출소한 모친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후유증으로 모친은 5년 이상 몸을 건사하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요시찰 대상자로 지정돼 바깥출입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에다 구금 구타 후유증으로 1975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차가운 시선에다 연좌제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모진 세월 내내 조희덕씨의 삶도 힘겨웠다. 친가 친척들은 발길을 끊었고, 외가 식구들의 보살핌 속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왔다. 그는 현재 (사)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자 경주시유족회 이사로 활동한다.
"유족들은 어럽게 살면서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국가에서 적절한 보상이 이뤄져야 합니다. 보상도 보상이지만, 과거사 재단이 설립돼야 합니다. 국가를 위해서 희생된 만큼 국가 유공자로 지정돼야 합니다."
보도연맹 관련 경주시 진실규명... 1차 34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