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빈동전투의 주역 정경진 대위는 중령으로 예편한 뒤, 2015년 별세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우희철
중대전술기지를 이용한 하룻밤의 전투로 태극무공훈장 수상자를 2명이나 배출한 사례는 건군 이후 단 한 차례뿐이었다. 1967년 2월 14~15일 밤에 있었던 베트남전 짜빈동 전투로, 훈장의 주인공은 정경진 대위와 신원배 소위다.
2해병여단 11중대장과 같은 중대 1소대장이었던 두 영웅이 배치된 짜빈동 중대 기지는 베트남 중부 꽝응아이성 내륙의 요충지였다. 당시 해병여단 지역은 베트콩 세력이 활발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1967년 2월 14일 오후 11시 30분쯤에 한차례 공격이 있었고 이어 오전 4시 10분쯤부터 1개 연대 규모의 적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
3소대 지역에 2개 대대, 기지 남쪽 1소대 지역에 1개 대대 규모를 집중한 적은 기세가 대단했다. 한때 3소대의 외곽 방어선이 돌파되기도 했다. 여단에서는 진내 사격을 심각히 검토하는 등 위기에 처했지만 끝내 적을 물리쳤다. 오전 7시 20분쯤, 상황이 반전되면서 적은 전의를 상실한 듯 부상자를 부축해 도주하기 시작했다.
확인된 전과는 적 사살 243명, 포로 3명 등이었으며, 그보다 훨씬 많은 적이 사살되거나 부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됐다. 반면 11중대는 15명이 전사하고 33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보았다. 1개 중대 병력으로 연대급(3개 대대 이상)의 적을 막아내는 신화를 만들었다.
전투가 끝나자 미 해병 3상륙군단장인 월드 중장은 "내가 월남전에서 처음 보는 전과(戰果)"라며 '우방군의 귀감'이라고 극찬했다. UPI통신은 한국 해병대가 '신화(Mythological story)'를 만들었다고 전 세계에 타전했다.
청룡 제11중대는 한·미 양국 대통령으로부터 부대표창을 받고 부대원들이 모두 1계급 특진 됐다. 중대장 정경진 대위와 제1소대장 신원배 소위는 군인 최고의 명예인 태극무공훈장과 미국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이 전투를 지휘한 정 대위는 연이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1977년 63대대장을 거쳐 1981년 중령으로 예편,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사무총장 등을 지냈다. 향년 79세인 2015년 10월 15일 그가 숨진 뒤 해병대는 그의 장례를 해병부대장으로 치렀고 그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신현배 소위는 승진을 거듭해 해병대 2사단장까지 지내고 1997년 해병대 소장으로 예편했다. 재향군인회 사무총장을 역임하는 등 현재까지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폭발로 전사한 송용웅 소령, 35년 만에 조국 귀환한 박우식 소령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이들은 5099명에 이른다. 대부분은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혔다. 이중 송용웅 소령은 대전 출신으로 서울 현충원에 안장됐다가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한 경우다. 송 소령은 1934년 대전시 동구 홍도동 태생으로 맹호부대인 수도사단 기갑연대 제5중대에 소속되어 파병되었고 빈딘성 일대에 주둔했다.
1966년 10월 30일 콩강자유교량에서 수색정찰 중 베트콩의 부비트랩 폭발로 전사했다. 충무무공훈장을 받았으며, 국립서울현충원 장교1묘역에 안장되었다가 1998년 5월 12일 대전현충원 장병1묘역으로 이장했다.
박우식 소령은 제9사단 소속으로, 1958년 12월 20일 입대해 베트남전 당시 백마부대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물소작전에 투입되어 1967년 12월 2일 작전 중 미군헬기를 타고 부대로 복귀하던 중 짙은 안개와 야음 등 기상악화로 헬기가 봉로만 해상에 추락하여 미군 승무원 4명과 함께 전사했다.
박 소령의 유해는 실종 35년 만에 미군 유해발굴단이 유전자 감식을 하던 중 신원이 확인됐다. 멀고 낯선 베트남 땅에서 35년의 세월을 덧없이 묻혀 있다가 2002년 7월 조국의 품으로 귀환하게 된 것이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박 소령은 현재 국립대전현충원 장교 제2 묘역에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