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형된 피맛길2010년을 전후하여 피맛길이 사라지고, 재개발된 빌딩 사이로 동굴처럼 변해버린 길의 흔적.
이영천
도시에서 '길과 골'은 전혀 다른 의미로 읽어내야 한다. 길은 하나의 통로이자 흐름이며, 도시 골간을 이룬다. 골은 크고 작은 여러 길이 서로 얽히고 이어져 자연스레 만들어진다. 길이 선(線)이라면 골은 면(面)이라 할 수 있다.
늘 번잡하기만 한 종로 뒷길이다. 신도시 한양을 만들면서 고관대작이 탄 말(馬)을 피(避)하라고 하급 관리들에게 권력이 내어준 능동과 융통, 관용의 길이었다. 이 길이 새로운 문화를 지어내더니, 다른 그것들과 구불구불 서로 잇대어 골을 만들어냈다. 피맛골이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탑골공원에 이르는 자연스레 만들어진 '공간조직'을 흔히 그렇게 불렀다.
길에 고만고만한 집들이 모이더니 해장국과 빈대떡, 막걸리에 생선구이를 선보이는 서민 전유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골은 청진동, 공평동, 인사동 일대에서 6백여 년을 넘겨 자리했으니 하나의 문화였고 역사였으며, 시대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했었다.
노동과 휴식, 주거와 일상 활동을 매개하던 점이지대였다. 하지만 골 흔적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시늉으로 남겨진 길은 동굴과 구별하기 어렵게 되었고, 골이 지워진 자리를 몇몇 거대한 직육면체 사무용 빌딩이 차지해 버렸다. 무척 낯설고 생경한 풍경이다.
지워진 길과 골
도시와 그를 이루는 공간조직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다. 생성-성장-전성기를 지나 쇠퇴-재생-변형하는 순환적 과정을 밟는다. 따라서 시대 변화에 따라 길과 골도 낡아가고 때론 그 생명을 다하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