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권성동 당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가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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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통치 단위에서 전체 공동체의 복지와 생존에 기여하는 각각의 중요성에 비례해 권력의 몫을 부여함으로써 서로 상이한 이해관계들을 조정하는 활동."
<정치를 옹호함>의 저자 버나드 크릭이 내린 정치에 대한 정의다. 그가 강조하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조정하는 행위로서의 정치가 지금 우리 사회에는 없다. 법과 원칙에 따른 엄정 대응이라는 협박, 극단적인 진영 대립, 내로남불, 갈라치기가 있을 뿐. 신뢰받는 정치인도 없다. 정치인들이 모인 국회에 대한 신뢰도는 정부기관들 중 꼴찌다.
폭력적 지배와 억압, 기만, 권모술수 등 부정적 개념으로 이해된 민주화 이전의 정치의 개념은 우리의 일상용어에도 영향을 미친 듯하다. 정치적이란 말은 뭔가 정의롭지 않고 원칙에서 벗어나고 기회주의적이라는 뉘앙스로 쓰인다.
영국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크릭도 많은 사람이 정치란 혼란스럽고, 모순적이고, 비효율적이며, 속임수나 음모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크릭은 정치적 활동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희소하고 소중한 어떤 것"으로 규정하고 옹호한다.
정치란 "공통의 지배를 받는 하나의 영토 단위 내에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전통을 가진 다양한 집단들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하기에 "정치를 포기하거나 파괴하는 것은 다원주의와 다양성에 기반을 둔 문명사회 질서를 부여하는 바로 그것을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복잡 다양한 상황에 대한 응답이고 개인정 정체성에 대한 확신과 보존이므로 모든 것을 단일한 이론으로 환원하고 획일화하려는 이데올로기로부터, 타자를 배제하고 정치적 자유를 훼손하는 민족주의로부터 옹호되어야 한다.
정치는 민주주의로부터도 옹호되어야 한다
정치는 민주주의로부터도 옹호되어야 한다. 이 주장은 좀 의외일 수 있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역사를 지닌 우리에게 독재는 나쁜 정치이고 민주주의는 좋은 정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릭은 민주주의란 많은 사람이 생각하듯 "모든 것이 반짝반짝 빛나고 아름다운 상태"가 아니라 단지 정치의 한 형태일 뿐이라며 민주주의를 상대화한다.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은 나치와 공산주의를 예로 들어 민주주의와 정치는 별개이고 "다수의 지배"로 이해되는 민주주의가 다원성과 다양성을 파괴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다만 그는 이 책에서 다수의 전제(tyranny of the majority)로 전락하지 않는 민주주의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검색해보니 그의 다른 책 <민주주의를 위한 아주 짧은 안내서>에서 근대민주주의와 포퓰리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제도로 시민공화주의를 제시했다고 한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입장에서 논평하기 곤란하지만 공공선과 시민적 덕성을 강조하는 공화주의로 민주주의의 실패를 해소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같아야 한다는 민주주의 원칙을 전도한 결과, 정치인들이 국민의 뜻이나 공적 가치보다는 사적 이익을 먼저 추구하는 주인-대리인의 딜레마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를 교정하기 위해 국민투표, 국민발안, 국민소환 등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자칫 독재자나 무책임한 정치인들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있다. 적대적인 정치나 포퓰리즘을 강화할 우려도 있다. 대안은 공론조사, 시민의회 등 작은 공중(mini-public)에 기반을 둔 토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제도화라고 생각한다.
정치는 기술·과학·행정으로 환원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