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 1묘역 278번 묘 옆 대나무 사이로 접어들면 보훈둘레길 노랑길이 나온다. 그곳에 들어가면 바로 사우당 이시담의 묘를 발견할 수 있다.
임재근
대전국립묘지(현 대전현충원) 예정부지였던 갑동은 150여 세대, 5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연안 이씨 집성촌이었다. 대다수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포도를 재배하거나, 닭이나 칠면조 등 가금류를 키우기도 했다. 토지가 수용되면서 58세대는 인근에 조성된 새마을 동네로 이주했고, 28세대는 덕명동으로 이주했다. 나머지 60여 세대는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동네에는 연안 이씨 묘소가 많았는데 모든 묘를 옮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은 이주하더라도 시조 묘만은 존치코자 했던 연안 이씨 문중의 간곡한 진정으로 다른 묘는 모두 이장하는 조건으로 이시담의 묘를 포함해 2기의 묘는 그대로 존치할 수 있었다.
댐이 만들어지면서 마을 전체가 수몰되는 경우처럼, 국가정책과 국책 사업으로 고향에서 쫓겨나고 고향을 잃어버리는 경우들이 많은데, 국립묘지 조성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국립묘지에는 사설 묘를 둘 수 없는 것이 원칙이라 하지만, 대전현충원 내에 위치한 2기의 사설 묘를 통해 그곳도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이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도로공사로 오래된 고목들이 잘려나가는 게 아니라 아름드리나무를 살리기 위해 우회시키는 길을 만난 것처럼 반가운 마음도 함께 든다. 또, 분단으로 인해 황해도 연안의 시조 묘를 갈 수 없어 제단 성격의 단소를 설치한 사실을 통해 분단의 아픔도 함께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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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에 단 2곳뿐인 민간 묘지... 어떤 사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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